❤️ 비잔틴 시대 미술

        - 비잔틴 시대 미술의 역사적 흐름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인 콘산티노플로 옮긴 것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395년 로마 제국의 동서로 분열되었고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이 시점이 서양 중세의 시작으로 중세는 1400년까지 1천 년 동안 이어진다.

반면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의 역사는 1453년까지 이어진다.

서양 미술사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인정한 시점부터 동서 로마 제국의 분열 이후 서로마 제국 지역에서 나타난 점들을 역사적인 맥락으로 서술하고 있다.

로마제국은 영토가 너무 넓어져서 4등분 하여 다스리게 되었다. 아시다시피 로마는 끊임없이 영토를 넓히다 보니까 나중에는 너무나 이 영토가 비대해져 가지고 황제 혼자서 도저히 다스릴 수가 없어 4명의 황제를 나누어주는 사분령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4명의 황제가 나중에는 6명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까 황제 중 한 명이었던 콘스탄티누스라는 황제가 다른 황제들을 정리하고 강력한 경쟁자인 막센티우스하고 최후의 일전을 하여 콘스탄티누스가 라바룸이라 표식을 천사에게 받아서 결국 막센티우스를 이겨서 서쪽 로마 지역의 대권을 잡았다.
서로마의 단독 황제가 된 콘스탄티네스는 동남아 황제는 서로마 황제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합의 하에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내리고 결국 동쪽에 있던 황제마저도 굴복시키고 드디어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서쪽에서는 게르만족이 자꾸 침략을 하고 그리고 동쪽에서는 페르시아인들이 자꾸 침략을 했다. 그러다 보니까 콘스탄티누스가 수도인 로마를 떠나서 당시에 경제적인 중심지이자 전략적인 요충지인 이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이전을 했다.
이 비잔티움이 오늘날의 터키에서도 이스탄불이다.
비잔티움을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해 콘스탄티노풀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
서쪽 지역이 통치자가 비어버리니 서쪽 지역에다가 황제를 한 명 두고 다스리게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로마 제국은 두 곳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게르만족이 서쪽 지역에서 계속 밀고 내려오다 보니까 결국 476년에는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이제 폐위돼 버리고 게르만족에 의해서 결국 서로마는 망했다.
서로마는 망했지만 기독교는 그대로 남아서 오히려 서로마 기독교의 책임자인 교황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다.
동서가 이렇게 분열되었지만 완전히 남남이 된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관계는 유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 비잔틴 시대 미술의 특징 

      - 비잔틴 시대 미술의 실제 표현 방법과 특징

초기 기독교인들은 우상이나 신상을 떠올리게 하는 조각상 제작에는 반대를 했다.
하지만 회화는 성경의 내용을 전달해주는 기능을 하니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결국 6세기 말에 서로마에 있는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이를 지지해 준다.
하지만 그냥 아무렇게나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정해진 규칙이 있었다.
조건: 단순하게 그리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는 요소들은 배제하자 그래서 결국 사실성에 입각한 그림들은 꺼려지게 되었다.
바로 모자이크가 유행하게 된 이유가 생겨났다.
기독교 미술 초기에는 모자이크가 유행했는데 여기에서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은 모자이크가 유행한 이유로서는 첫 번째가 헬레니즘 시기의 영향이라 할 수 있고 헬레니즘 시기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모자이크를 많이 이용해서 대중화시켰다. 그런 점에서 그림보다 비싸니까 나는 이만큼 부유하다.라고. 부의 과시가 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당시 미술 양식의 영향이라고 되어 있는데 모자이크는 돌이나 유리 조각을 자른 것이라서 아무리 잘 만들어봤자 회화보다 사실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독교 미술에서는 이제 더 이상 사실성이 중요하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모자이크의 투박함도 용인이 될 수 있다.
세 번째로 신비로운 이미지라고 했는데 기독교 이전의 신들은 인간성도 갖고 있고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우며 여러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은 인간적인 모습도 있고 자연적이고 구체적인 존재였지만 기독교의 신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뭔가 신비로운 이미지를 사람들이 추구하게 되었다.
모자이크는 의도적으로 표면을 울퉁불퉁하게 만들어 가지고 빛이 반사되니까 빛의 반사에 따라서 신비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질 수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

가운데의 예수님이 계신 이 모자이크는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한다.
5개의 빵과 두 개의 물고기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신 기적을 나타낸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일단 이 예수님이 입으신 옷은 로마의 황족을 상징하는 자주색 의상을 입고 있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빵과 물고기를 지금 받고 있다. 그런데 받는 장면을 가만히 보면은 직접적으로 손을 터치하는 게 아니라 제자들이 옷으로 손을 가린 채 물건을 받고 있다.
이것은 당시 일반인들이 황제의 손에 직접 접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걸 막으려고 이런 식으로 손에다 무엇인가를 감싸고 했다고 한다. 이게 바로 반영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여기서는 예수님이 황제의 모습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옷주름을 보면 예수님에게서 뭔가를 받으려고 팔을 틀었는데 거기에 따라서 옷주름들이 이렇게 세부적으로 이렇게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바위들을 보면 여러 가지 색깔을 칠해가지고 어느 정도 입체감을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이걸 만든 사람은 그리스 미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다만 단순 명확하게 만들으라는 원칙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충실하게 이걸 제작했다.

 

❤️ 서로마 동로마의 갈등과 비잔틴 미술

        - 서로마와 동로마의 갈등

서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그림으로 성경의 내용을 묘사하는 것은 허용했다
서로마 쪽은 더 이상 논란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동로마 쪽은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서로마는 교황이 기독교의 총책임자이고 성직자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에 반해서 동로마는 세석권과 기독교를 모두 틀어쥐고 있는 사람은 황제였다.
그런데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가 730년에 성상 숭배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조각상은 물론이고 이제 페어로도 그리스도나 성녀 등을 그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걸 자신들뿐만 아니라 서로마에도 강요를 했다.
당시 동서 로마는 서로 갈라졌지만 로마 교황이 동로마에 세금을 내고 간섭도 받는 그런 처지였다.
하지만 성상 숭배 금지령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세상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포교하려면 구체적으로 보여줄 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로 두 로마는 완전히 남남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 후에 동로마는 레어 5세 때 또 한 차례의 성상 숭배 금지령이 내려졌다가 이 금지령이 점차 지지를 잃어서 결국엔 성상 숭배를 허용한다.
이제는 미술가들이 마음대로 막 그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까지 허용할 수는 없으니까 어떤 정해진 틀에 맞춰서 그리도록 했다. 그러한 그림을 이콘이라고 한다.
비즈틴 제국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의 관념을 따르도록 했다.
성모의 옷이 그리스의 조각상을 보듯이 주름이 잡혀 있고 약간 딱딱한 느낌이 나게 마치 조각한 것처럼 표현되었다. 얼굴이 그냥 단일색으로 평평하게 친해진 게 아니라 명함도 있고 나름대로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그리스 헬레니즘 시기의 특징이 얼굴에 입체감이 있고 그리고 조각상에 새겨진 주름 같은 것이다
성모의 무릎 부분이 빛의 반사가 일어나도록 금빛으로 표현하거나 빨간색 의복이라든지 보라색 혹은 진홍색 같이 황족의 색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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