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켈란젤로의 조각

        - 피에타와 다비드상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내 오른쪽에 전시되어 있고 2m에 달하는 높이와는 달리 옆면의 두께는 1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옷자락 주름의 입체감 때문에 깊이 있는 공간감이 효과적으로 나타난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의 아름다움과 예수의 죽음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메디치가가 또 물러가고 사브나롤라라는 독재자가 한동안 통치 한 후에 새로운 공화정이 성립을 했다.
그래서 새로운 공화정의 정신을 기르기 위해서 시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공화정의 상징인 궁 앞 광장에 이 다비드상을 세웠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거장의 반열에 오른 미켈란젤로는 1501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로부터 성당의 북쪽 익랑 위에 있는 부벽에 올려놓을 다윗을 조각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돌팔매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을 통해 압제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쟁취한 피렌체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담긴 작품이었다. 그는 조각의 재료로 적당하지 않다고 두 명의 조각가로부터 작업이 수십 년째 중단되어 버려진 5.5m짜리 거대한 대리석이었다.

그런데 26살의 미켈란젤로가 약 3년 동안의 기간을 거쳐서 다비디 상을 만들어냈다.
5m짜리의 거대한 조각은 10대 미소년의 모습으로 표현한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상과 달리 청년 다윗으로 조각을 했다.

그런데 6톤에 이르는 조각상을 성당의 높은 곳에 올리기가 쉽지 않았고 장엄한 걸작을 성당 부벽 같은 곳에 갖다 둘 수 없다고 판단한 오페라 델 두오모는 다비드 상이 새롭게 놓일 장소를 정하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산드로 보티첼리를 포함한 피렌체 시민 30인의 위원회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토의 결과 이 조각상을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피렌체 시청 베키오 궁전 앞에 놓기로 결정했다.
미켈란젤로의 삶중에서 가장 자유롭고 자신의 명성과 존중을 받으면서 산 유일한 시기라고 한다.

        - 고난의 시스타나 천장화

교황권의 확립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율리우스 2세 교황은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무력으로 정복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강성 교황이었다.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대형 건축과 예술에 돈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이 소위 16세기 초 로마의 르네상스의 계기가 되었다.

건축가 라만테를 불러서 성 베드로 성당을 짓게 하고 조각가 미켈란젤로, 천재 화가 라파엘로를 불렀다.
미켈란젤로에게는 율리우스 2세가 자신의 영묘 자신의 무덤의 조각을 맡겼는데 가장 좋은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서 미켈란젤로는 약 100km 떨어진 곳에 직접 가서 우마차로 항구까지 옮겨서 그리고 배에다 그걸 싣고 로마까지 그 대리석을 운반을 8개월 동안을 이 고된 작업을 했다.
그런데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가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 나서 피렌치로 돌아가버린 미켈란젤로는 볼로냐에 마지못해 다시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교황 앞에 사죄를 했었다.
교황은 조각가인 그에게 그림을 그리라는 명령을 했고 그는 여러 차례 도저히 자신을 못하겠다고 교황에게 말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할 수 없이 그는 시스티나 성당에 천장에 매달려서 고된 작업을 무려 4년 동안이나 해야 했고 그 4년 동안의 모진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서 미켈란젤로는 성당의 천장을 다 덮은 이 거대한 회화를 경이적인 속도로 마쳤다. 보통 화가들은 그 10분의 1의 크기인 벽화도 3년 동안 그렸지만 그는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을 4년이 걸린 것이다.

회화라는 장르 자체를 싫어하는 데다가 하필 천장화. 조금만 잘못 하면 회반죽이 얼굴로 떨어지기 일쑤고, 이런 과정으로 이런 천장화을 그려내려면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야 하기에 극단적인 심리적인 고통 속에서 이와 같은 대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천장 벽화는 사방에 구약의 선지자들의 그림을 그려놓고 그 가운데 천지 창조 장면을 그려놓았다.
그 핵심에 바로 신이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는 장면을 그려놓은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탄생하는 장면을 묘사를 하고 있는데 르네상스적인 휴머니즘을 이 작품 속에서도 표현하고 있었다.

 

        - 최후의 심판

클레멘스 7세는 계약서에 서명을 한 직후 하느님의 곁으로 돌아갔으며, 그 다음 교황인 바오로 3세 때에 작품이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바오로 3세는  '교황청의 최고 건축가, 화가, 조각가'로 임명하는 포고령을 반포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중앙의 예수부터가 성화에 그려지는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다 못한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그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종말 속에서 간신히 건져 올려지는 의로운 성도들이, 좌측에는 예수에게 가차없이 쫓겨나는 가짜 의인들이 그려져있다. 게다가 우하단을 보면 그렇게 내쫓긴 거짓 증인들을 악마들이 가차 없이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으며 심판을 선포하는 천사들도 이들을 혐오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실오라기도 없는 말 그대로 나체 상태였다.

1564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로마 전례를 재정립한 후 로마 전례 상 나체화를 허용하지 않기로 한 것에 따라, '비속한 부분은 모두 가려져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져 대대적인 검열 작업을 받게 되었으며,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그림의 인물에 옷을 그려 가리도록 해서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어려운 시기마다 권력자들이 자신에게 허망한 약속을 했고 또 자신이 오직 노력을 한 그 모든 것들이 좌절되는 순간순간들마다 그런 일어나서 오히려 그때마다 대작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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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과 그의 생애

        - 아테네 학당을 그릴 때

1504년에서 1508년까지 피렌체에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화가로서의 활동을 마치고 마침내 그의 예술가로서의 최전성기를 맡게 되는 로마에 입성하게 되었다.

율리우스 2세는 16세기 초 피렌체에서 르네상스의 흐름이 로마로 오게 되는데 로마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예술의 조예가 깊었던 교황이다.
그는 교회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여러 예술가들을 로마로 불러들이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부르게 되는데 브라만테는 베드로 성당을 짓게 하고 미켈란젤로를 자신의 영묘를 조각하고 라파엘로를 불러서 자신의 집무실 4개의 방에 그림을 그리게 시켰다.
이때 라파엘로는 교황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피렌체에 그렸던 많은 그림들을 들고 갔었다.
그 그림을 본 교황은 너무 마음에 들었고 이미 1507년에 교황의 개인 집무실을 꾸미기 위해서 고용한 당대 최고의 화가들을 해고시켜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개인 집무실 벽화를 라파엘로에게 모두 맡겨버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쫓겨난 화가들 가운데서는 그의 스승 페르지노도 있었다.
페르지노의 작품 천장화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그림들은 전부 뜯어내버리고 거기다가 새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4개의 방은 지금 라파엘로의 방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이제 서명의 방인데 서명의 방 가운데 이와 같이 네 명의 신학, 철학, 예술, 법학을 상징하는 여신들을 그려놓고 각각의 네 벽에 그 주제에 맞게 신학에 관한 주제, 철학에 관한 주제, 예술에 관한 주제, 법학에 관한 주제를 각각의 주제에 맞는 그림을 그려 넣었고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아테네 학당인 것이다.

 

 

어테네 학당

아테네 학당 이 대작을 보면요. 원근법이 잘 적용된 궁전 같은 이 학당 공간 안에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총 54명이 망라되어져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선 제일 먼저 배경으로 두 신 대 그리스의 신들 중에 지혜와 이성을 대표하는 아폴론 신과 아테네 신이 그려져 있었다.

엄밀하게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위에는 사상가나 철학가들을 그려놓고 있고 밑에 쪽에는 수학자나 과학자 예술가들을 선별해서 그려놓고 있다.

라파엘로 자신의 얼굴과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이제 라파엘로는 자신을 이처럼 오른쪽 끝에 벽면에 그려놓고 있었다.
라파일로 자신이 정면을 보고 있다. 알렉산더 시절에 굉장히 유명했던 두 명의 궁정화가 아펠레스와 프로토 제네스 중에서 아펠레스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화가의 얼굴에 화가인 자신 얼굴을 그려 넣은 것이다.
그리고 왼편에 하단에 여인의 얼굴이 보인다.
이 여인의 얼굴은 고대 여성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히파티아를 그린 것인데 이 히파티아의 모델이 되는 여인은 자신의 연인인 마르게리타 루티이다.

히파티아는 4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수학자이자 철학가였다.
지성과 미모를 경계했기 때문에 수많은 남성들의 청원을 받았다. 하지만 저는 이미 진리와 결혼했어요 라고 말하면서 수많은 청원들을 거절하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결국 히파티아는 젊은 나이에 이단이라고 하는 그런 모함을 받고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라파엘로의 연인 이 여인이 바로 마르게르타 루티이다.
특히 수많은 성모의 얼굴 모델이 되었는데 기존의 성모들과는 달리 아름다우면서도 관능적인 성모의 그런 모델로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마르게타 루티는 라파엘로가 사랑했던 여인으로 라파엘로는 아주 사교적인 성격에다가 미남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수많은 여성들이 이 라파엘로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중에서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 바로 제빵사의 딸이었던 마르게리타 루티였다..
당시에 라파일로는 화가 중에 화가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반면에 제빵사의 딸은 신분적으로 매우 낮은 계급에 속했다.
그래서 이 마음 약한 라파엘로는 굉장히 사랑했지만 둘의 사랑이 알려지게 되면 후원이 끊기고 명성이 손상될 것을 염려해서 둘의 사랑을 비밀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게리타가 자존심이 상해서 떠나버리고 떠나버린 그녀를 다시 붙잡기 위해서 라 포르나리나를 그렸다
그 작품 속 여인은 손모양이 정숙한 비너스에 손 모양을 하고 있교 머리에 진주가 장식되어 있다. 진주는 사랑의 결혼식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다음에 여기 팔찌를 그렸는데 팔찌를 확대시켜보면 우르비노의 라파엘로라고 새겨져 있고 약지 손가락에 반지가 그려져 있다.
이 작품 속에서 이 세 가지 상징물 모두가 다 결혼식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언젠가는 너와 반드시 결혼하겠다라고 하는 라파엘로의 진심을 담아서 이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을 보고 실제로 라르게르타가 감동해서 돌아왔고 둘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다.
그러나 1년 후에 이 작품을 그린 지 1년 후에 37살의 나이로 라파엘로가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죽었고 마르게리타 루피는 라파엘로를 죽게 만든 여인이라는 비난을 또 엄청나게 들었다.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한 인물은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철학자이다.
그 모델이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이다.
즉 헤라클레이토스의 모델로 미켈란젤로를 그린 것이다.

사실 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특별히 미켈란젤로가 거의 피해의식에 가까울 정도로 라파엘로를 싫어했다.
주로 자신의 그림을 모방했다는 거 그리고 브라만테와 더불어서 자신을 모함한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라파엘로와 친했던 인물들은 거의 그 작품 속에 들어가 있는데 미켈란젤로는 거기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라파엘로가 이 그림을 그릴 바로 그 시기에 바로 그 옆에 시스텔라 성당에서는 미켈란젤로가 그 유명한 천장벽화 천지창조를 그리고 있을 때였다.
그야말로 둘 사이에 라이브 의식이 절정에 달했던 그런 시기이다.
미켈란젤로는 혼자서 그 힘든 작업을 다 그려내고 기존에 있었던 보조자들마저도 다 잘라버렸다.

그런데 아테네 학당이 1511년에 완성되었을 때는 미켈란젤로의 모습은 거기에 그려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1512년에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완성 되었다.
천지 창조가 완성이 되어서 개봉이 되어지는 그날 이 작품을 보고 라파엘로는 완전히 자신의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자신이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그런 대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라파엘로는 그의 아테네 학당에다가 미켈란젤로를 그려 넣은 것으로 존경심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의 중앙으로 가면 그 유명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다.
이쪽에 보면 플라톤의 제자들이 있고 이쪽에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이 쭉 서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확대시켜 놓고 보면 플라톤은 손을 위로 올리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을 향하고 있고 플라톤은 아래의 세계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이상 세계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라고 하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 세계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라파엘로는 다빈치를 대단히 존경했기 때문에 플라톤의 모델로 다빈치를 그려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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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절한 천재 화가 라파엘로  미술 생애

        - 라파엘로의 생애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화풍을 잘 흡수하고 또한 독창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발전시켜서 르네상스 미술을 완성했다. 르네상스의 모든 특징이 다 잘 드러난다. 주문한 작품을 모두 완성해서 주문자에게 돌려주는 타고난 성실했고 큰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만들었던 비결이었다.

라파엘로 산치오 다 우르비노는 아테네 학당이 특히 유명한데 <아테네 학당>은 에피쿠로스, 피타고라스, 안티스테네스 등 고대 그리스의 학자가 학당에 모인 것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그는 우르비노 공국의 궁정화가, 조반니 산티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11세에 당대 이름을 날리던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 들어가 도제, 조수로 활동하였다. 화가, 조각가, 건축가, 데생화가, 제도사, 디자이너로서 초기작에서 스승의 영향이 보인다. 1499년 페르지아에서 피에트로 페르지노라고 하는 화가에서 배웠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1508년에 교황 율리우스2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간 그는 그의 대표작인 아테네 학당이 포함된 프레스코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라파엘로의 특징이기도 한데, 다른 화가의 장점을 흡수하여 한 발 더 나아가는 모습이 지속적으로 보이게 된다.

라파엘로는 두 거장에게 배울 수 있는 굉장히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두 거장의 작품들로부터 그는 많은 것들을 실제로 열정을 가지고 배웠고 한편으로는 두 과장을 비롯해서 수많은 쟁쟁한 화가들로 넘쳐났던 이 피렌체에서 화가로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1500년부터 자립하여 그림을 의뢰받기 시작하였고, 1504년부터 피렌체에서 활동하였다. 1508년 로마로 건너가 교황 및 가톨릭교회의 의뢰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504년 피렌체에서 예술적 전통에 고취되면서 F.F. 바르톨로메오의 장대한 화면구성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암법을 배워 페루지노의 영향을 탈피하고 피렌체 파의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교황청의 건축과 회화, 장식 등 미술 분야에 관한 감독 책임을 맡고 있던 라파엘로는 1518년의1518년의 《레오 10세의 초상에서는 군상을 훌륭한 솜씨로 처리하여 뛰어난 초상화가임을 증명하였다. 만년에 심혈을 기울인 그리스도의 변용(바티칸)을 완성하지 못한 채 그의 위대함을 알아보고 교황 직위를 내리려 했던 추기경 레오 10세는 라파엘로가 요절하자 그를 애도하면서 국가장을 치르게 한다. 라파엘로는 현재 로마의 판테온에 묻혀있다.

성실함과 사교적인 성품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품의 의뢰를 받아 훌륭히 마무리지었다. 르네상스의 절정을 이룬 화가답게 그의 그림은 고전 미술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단정한 선과 형태, 명료한 색상, 기품 있는 인물의 자세 연출, 배치와 구도의 극한에 다다랐으며, 르네상스 미술의 최고 덕목이자 서양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교과서처럼 여기는 '우아한 아름다움(Grazia)'의 원형을 만들었다.

영향을 다빈치로부터 받았다
간결한 피라미드 구조 또는 효과적인 빛의 사용 명암법, 수프마토 기법을 그래서 경계를 회하게 하는 수프마토 기법을 다빈치가 사용했는데 그것이 또 라파엘로에게도 영향 주게 되었다.

라파일러의 다빈치에 대한 존경심은 정말 대단한 것이어서 아테네 학당에서 플라톤의 얼굴을 다빈치로 그려놓을 정도였다.

 

세레자 요한이라는 작품을 보면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오른팔 즉 성 세례자 요한의 오른팔이 근육이 발달해했다. 이것은 미켈란젤로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고 다빈치적인 요소인 빛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인물을 돋보이게 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빛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성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돋보이게 만들었고 단순히 이 두 사람을 흉내낸 것이 아니라 사실은 창조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성 세례자 요한이 상당히 아름다웠고 그리고 이 몸이 우아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이 미켈란젤로와 다비치를 흡수하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창조해낸 라파엘로였다.

 

 

❤️ 최고의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미술 생애

1475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라 아래쪽 근처에 카프레세에서 탄생을 했다.

지방의 지방 관료로 파견되어 있었던 아버지 루도비코 부오나로티와 어머니 프랜치스카 사이에서 다섯째 중 둘째로 태어나게 된다.

6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평생 그의 삶에서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처럼 남아 그의 작품 속에서도 스며들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태어나자마자 석공 부인이었던 유모에게 맡겨지게 된다.
바사리라는 지역에서 하늘에서 재능을 자기에게 주었다면 바로 그 유모로부터 석공의 아내였던 유모로부터 아마 그 재능을 물려받았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당대의 최고의 화가의 공방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거만하여 다른 친구들의 작품이 너무 하찮게 보아서 

친구와 다툼이 생기고 주먹으로 얻어맞아가지고 그의 코가 주저앉아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그때부터 갖게 되었다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그때부터 갖게 되었다

자신의 얼굴을 많은 화가들이 작품 속에 은근히 넣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한 번도 그러지 않았고  최후의 심판에 묘하게 들어가 있다.

로렌초 데 메리츠가 자신의 대에 와서 자신도 역시 할아버지처럼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을 하고 있는데 뛰어난 조각가가 나오지 않는 것 몹시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가문이 있는 그 성당에다가 조각학교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많은 고대의 작품들을 고대 조각상들을 거기다 모아놓고 도나텔로의 제자를 교장으로 앉히고 조각가를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최고의 화가인 기를란다요에게 조각의 재능이 있는 꿈나무들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때 바로 미켈란젤로가 추천을 받았다.

조각 학교에서 로렌초와 다빈치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조각 학교의 견습생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가 조각하고 있었다.
우연히 본 로렌초가 늙은 목신인데 너무 이가 고르지 않느냐 이렇게 묻게 된다.
그런데 며칠 후에 로렌초가 이 소년을 다시 만났는데 깜짝 놀라게 된다. 어린 미켈란젤로가 망치로 그 신의 이발에 몇 개를 부수고 정말 늙은 신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깜짝 놀란 로렌초는 자기가 찾았던 도나텔로의 뒤를 이을 만한 뛰어난 그런 조각가를 드디어 자기가 찾았다고 생각을 했고 그 이후에 아예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자기 집에서 키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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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다 다빈치의 일생과 미술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소년 시절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의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다.
다빈치라는 용어가 익숙해서 성시로 생각하기 쉬운데 다빈치는 그가 빈치 마을의 출신이라는 뜻이다.
그의 본명은 레오나르도 디세르 피에로 다빈치로 세르 피에로의 아들 레오나르드였다.
레오나르도의 아버지는 변호사였으며 어머니는 농민이었는데 사생아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서 신분상의 활동 제약이 있었다..

그나마 이탈리아는 다른 나라들보다 사생아에 대한 대우가 괜찮은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나 약사는 될 수가 없었으며 대학에도 진학할 수 없었다.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레오나르도가 합법적인 아들이었다면 공부를 시켰을지도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대학 진학이 불가능했기에 아들을 피렌체로 보냈다.
피렌체를 대표하는 도나텔로의 가장 우수했던 제자로 조각과 회화 등 다방 면에서 재능을 보였던 베로키오라는 화가의 공방에 수습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도나텔로의 사후 베로키오는 도나텔로의 후계자로서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는 미술가가 되었으며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가진 미술가라 할 수 있었다.
10대 중반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벨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가서
다른 수습생들처럼 청소와 잔심부름 등을 하며 미술을 배워나갔다. 그렇게 붓을 닦고 알료를 받는 등의 일을 하면서 그림 실력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레오나로도 다빈치는 공방 생활을 하는 동안 스승행 베로키오 외에도 보티첼리를 비롯해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을 마주하게 되면서 점점 능력을 키워나갔다.

베로키오는 당시 이탈리아 피렌체의 대표적인 화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페루지노 산드로 보티첼리의 스승이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청년 시절


그렇게 다빈치는 20살에 베로키오의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수로 참여해 화면 속에 보이는 꼬마 천사 두 명을 맡게 되었다. 
이후 1466년부터 1482년을 그의 제1의 피렌체 시대라고 부르는데 당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수태를 예고하는 부분을 표현한 수태고지 등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1482년부터 1499년을 제1의 밀라노 시대로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었는데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걸작 중 하나로 불리는 암굴의 성모와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모나리자를 그리는 화법의 바탕이 되는 스푸마토라는 다빈치의 화법으로 암굴의 성모가 제작되었다.
3차원의 세계를 그리는 방법으로 대기 원근법이라고도 불리죠 쉽게 말해서 회화에서 색과 색 사이의 경계선 구분을 부드럽게 처리하는 방법이다.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의 성당 수도원의 식당 벽화로 그려진 최후의 만찬은 다빈치의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의 요청으로 그린 그림이다. 
가로 880cm에 새로 460cm나 되는 거대한 작품이며 다빈치는 1495년부터 최후의 만찬 제작에 착수하여 3년 후인 1498년에 그림을 완성시켰다. 

수학적 계산으로 접근한 대칭적인 구도와 원근법 그리고 각 인물들의 성격을 바탕으로 그린 표정과 그들의 행동들은 당시 최후의 만찬의 장면을 드라마틱하고 섬세하게 표현한 걸작인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하루 전날 자신의 열두 제자들과 함께 가진 식사를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다.

예수는 누군가가 자신을 팔아먹을 것이라 말하고 그림에 범인이 누구인지 힌트를 주는 동시에 그 말을 듣고 놀라는 제자들의 제각각의 반응도 아주 잘 나타내었다. 소실점으로 다빈치는 원근법을 처음으로 나타내었다.

 

그다음으로 고대 로마의 건축과 비트르비우스가 쓴 건축 1 3장의 심장 건축 편에서 인체의 비율을 말한 것으로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원과 정사각형 안에 팔다리를 뻗고 있는 남자가 이상적인 인체 비율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팔이나 다리를 뻗으면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인 정사각형과 원에 드러났기 때문이다라고 쓴 대목을 읽고 그렸다고 전해진다.

이 그림을 보면 팔과 다리를 벌렸을 땐 이렇게 원에 딱 들어가고 다리를 붙였을 때 정사각형에 딱 들어가게 된다. 
똑바로 산 사람을 보았을 때 배꼽을 기준으로 머리끝까지와 발 끝까지의 비율은 11.61 8로 오늘날에도 디자이너들이 사용하는 황금 비율의 시초가 바로 다빈치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2 밀라노 시대와 모나리자

1500년부터 1506년을 그의 제2의2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그는 1499년 프랑스 왕 의 12세의 밀라노 침입으로 1500년의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제단화를 그리고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어 1506년 밀라노에서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우리 12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는데 1506년부터 1513년을 그의 제2의 밀라노 시대라고 한다.

1516년 프랑스 여왕 프랑스와 1세의 초청을 받아 그의 제자와 함께 이주해서 세 점의 그림을 완성시킨다.
이때 완성된 모나리자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다빈치가 그린 초상화로 현재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모나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어 경칭이며 리자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을 나타낸다.

가로 53cm의 새로 77cm 크기의 패널 위에 그린 유화이며 1503년에서 1519년경에 완성되었다고 추정된다.
모나리자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여인의 그린 초상화로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하여 넓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어 미스터리함을 풍기는 그림이다.

구도는 당시 가장 기본적인 초상화의 구도였던 피라미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인물을 배경보다 높게 배치하는 방식은 오늘날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기법이지만 르네상스 시대는 보기 드문 방식이다.
모나리자의 여인에게는 눈썹이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가늘게 그려져 있다..
당시에는 이마가 넓은 여자가 미인으로 여겨져 눈썹을 밀거나 가늘게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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