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얀 판 에이크의 그림

       - 얀 판 에이크의 시대적 배경

르네상스 14세기 때부터 상공업 중계 무역으로 국제 도시가 발달한 네덜란드 일부 남부 지방 그리고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 지대, 플란더스 혹은 플랑드르 지방에 돈이 많았기 때문에 예술이 발달했다.

유화라는 기법을 최초로 만들어 현재까지도 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친 얀 판 에이크는 브리고뉴 공국의 선량왕이라고 많이 부르는데 필립 공의 궁정 화가 및 외교 사절단의 멤버였다. 네덜란드/벨기에의 화가였고 플랑드르 화파의 대표적인 선구자로서, 이후 전반적인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 사조에 영향을 끼쳤다.

이전에는 주로 색깔이 담긴 추출물에 물과 날달걀을 섞어 그림을 그리는 '템페라' 기법을 주로 사용했고 방수 능력이 없어 물에 젖으면 그림이 함께 흘러내려 훼손되었고 캔버스에 그리면 그림이 금방 쩍쩍 갈라지는 단점이 있었다. 그것을 유화로 수정되어서 미술사에 획기적인 발명으로 생각된다. 반 에이크가 이러한 단점들을 보완하는 유화를 도입해서 반 에이크를 유화의 발명자로 보기도 한다. 유화 기법을 사용한 최초의 미술가. 그가 색채 가루(안료)를 최초로 기름에 섞어서 사용, 자연에 대한 세심한 고찰, 정교한 세부 묘사 등으로 인하여 중요하게 여겨진다. 대표작은 어린 양에 대한 경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가 있다.

        - 얀 판 에이크의 자화상의 의미

 

자화상이 되게 유명한데 이전에 화가들은 함부로 자화상을 못 그렸다. 그런데 얀 판 에이크는 그런 시대에 자화상을 그렸다는 것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가까이 확대를 하면 이 주름 하나하나 묘사가 더 디테일하다.
그림 사인으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다른 그림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은근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 얀 판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년 초기 네덜란드 미술의 거장 얀 판 에이크가 오크 화판에 유화로 그린 그림인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라는 작품을 그렸는데 이 작품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그 도시가 상공업으로 발달한 도시였기 때문에 그린 그림이다.
이 아르놀피니라는 상인의 부부 결혼식 모습을 기념해서 그린 것인데 안타깝게도 돌아가신 부인 늘 회상하는 그림이다. 

실내에 있는 조반니 디 니콜라오 아르놀피니와 그의 아내를 그린 초상화이며, 배경의 방은 플랑드르의 브루제에 위치한 그들의 저택일 것 같고 그림을 제작했을 때는 이 아내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고 한다.
남편이 그걸 기리기 위해서 그릴 것 같은 이 그림은 템페라 대신 유화 물감을 쓴 그림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그림이다.

빛을 이용한 실내 공간의 재현은 "방에 살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방 자체의 묘사까지 완벽한 실감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그림의 세밀한 부분까지 묘사했다.

그런데 그림의 모델이 다른 사람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부부라고 한 사람들이 그림이 그려진 지 13년 후이자 얀 판 에이크가 죽은 지 6년 후인 1447년에야 결혼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그림의 모델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조반니 디 아리고의 사촌인 조반니 디 니콜라오 아르놀피니와 그의 아내 중에서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두 번째 아내로 추정를 그린 것이라는 주장, 1433 2월에 사망한 첫 번째 아내 코스탄자 트렌타라는 가설, 반 에이크가 베를린에서 그린 초상화의 모델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그가 화가의 친구라는 주장 등이 제기되었다.

 

그린 그림 중에서 꺼진 불씨를 그렸는데 이는 죽은 부인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지 주장하는데 반 에이크가 그린 조반니 아르놀피니의 초상을 보면, 이 그림에 묘사된 남자의 얼굴과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 묘사된 남자의 얼굴은 상당히 흡사하다고 한다. 또 그림 중에 초 하나가 켜진 것은 유일신을 암시한다는 말도 있고 다양한 해석이 있기는 하다.
그림 속의 부부가 결혼하는 장면이라고 전제한다면 두 남녀의 맞잡은 손에 집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풍습으로 볼 때 서로의 오른손을 잡아야 정식 결혼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결혼인 것을 알리는 증거로 남자는 왼손으로 여자의 오른손을 잡고 있다. 당시에는 남자와 여자의 신분적 차이가 큰 경우 첩을 들이는 것과 비슷한 개념으로 '왼손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중간 중간 그려진 과일들을 통해서 당시에 아르노피니 부부의 사회적 지위, 부를 과시하는 모습을 알 수 있가. 또 옷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여인이 입은 옷의 패션은 실제 이 여인이 임신한 게 아니라 당시에 다산을 기원하는 하나의 패션이었다 보고 있다.


그림이 그려진 이 방은 침실이 아니라 응접실로 창문 밖으로 열매를 맺고 있는 체리 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부부가 여름철 2층 방의 모습을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프랑스와 부르고뉴 지방에서는 응접실에 침대를 두는 것이 유행했고 창문을 보면 목재로 만들었고 최상단에 끼워진 유리는 밝은 과녁 문양의 스테인드 글라스이다.

 

디테일 묘사의 시작된 것은 오일 페인팅의 시작이다. 강아지도 엄청 디테일하다.
살아 있는 것 같은 묘사를 했으며 옷감 묘사 반사된 이 거울 화가의 자화상도 이렇게 짧게 그려놓았다.

유화라는 물감이 발명됐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 때 회화라는 장르가 특히 발달했다고도 볼 수가 있다.
이 기법은 이탈리아의 기법이 전수되었다고 하는데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이라는 화가가 이탈리아 여행하면서 이 오일 페인팅 기법을 전수해줬다고 많이 보았다.

반 에이크가 수태고지를 그렸는데 갈라진 게 마치 돌 같고.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묘사한 그만큼 디테일한 묘사가 어느 정도인지를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작품 사이즈 훨씬 작다.
그래서 실제로 되게 작은 사이즈의 그림인데 작은 세필로 이걸 하나하나 다 묘사를 했다
수태고지라는 주제로 어떻게 사람이 이 정도까지 디테일하게 묘사를 할까 감탄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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