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기 기독교  미술

        - 초기 기독교 미술의 역사와 특징

서양 미술사에 등장하는 첫 번째 시기는 초기 기독교 미술의 시대로 밀라노 칙령이 발효된 313년에서부터
서 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까지 나타난 미술을 가리킨다. 

4세기 중엽에는 드디어 로마가 그리스도교 미술을 자기들 안에 인정하는 시기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있다면 313년 콘스탄티니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을 우리가 눈여겨볼 수밖에 없다.
313년을 중심으로 그 이전까지 기본적으로 로마는 기독교 세계에 대해서
제국의 종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313년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점차 점차 이 신앙을 중심으로 제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가치를 모두 바꾸게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 시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신화가 있듯이 다양한 신을 섬기는 다신교 시대였다.
유일신 사상인 기독교와는 당연히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다.

로마 시대 기독교인들은 큰 박해를 받고 자신의 신앙을 숨겨야만 했다.
카타콤에 숨어서 눈에 띄지 않게 자신들만의 기독교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이렇게 당시 기독교인들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카타콤에선 암호문들과 함께 종교적 색채의 벽화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런 그림들은 로마 벽화의 양식적인 특징이 보이기도 하지만 주된 내용은 역시 성경의 내용과 구세주 그리스도와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를 통해서 천국을 희망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길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이렇게 박해받던 기독교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부터 상황의 반전을 맞게 된다. 


초기 기독교 미술을 이해하고 어떻게 공인되었는지 살피기 위해서는 콘스탄티노스가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312 10 28일 로마의 밀비우스타리에서는 로마 제국 최고의 자리를 두고 콘산티누스 1세와 막센티우스 사이에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전투를 앞두고 콘산티누스는 꿈에서 환영을 보게 된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더니 십자가를 보여주며 이 표식으로 승리하리라는 말을 전해 준다. 영문을 몰랐던 황제는 방패와 깃발에 십자가 문양을 그려놓고 전투에 참여했다. 십자가를 앞세운 콘살티로서의 군대가 대승리를 거두었고 콘산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이런 신비한 체험을 한 콘산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보장해 주고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이르러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이렇게 지하에서 올라온 기독교인들은 숨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공개된 장소에서 교회를 짓고 모이기 시작한다. 넓은 공간이 필요했고 찾다가 바실리카를 대안으로 삼게 되었다.

바실리카라고 부르는 실내 공공건물이었다.
바실리카는 로마 시대의 공공건물로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열렸고 재판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초기 기독교 건축에서 말하는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들이 바로 이런 교회들이다.
로마네스크 고딕으로 이어지는 이 바실리카 양식은 로마 시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바실리카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길게 늘어진 직사각형, 장방형의 넓은 건물을 말한다.
바실리카를 양식은 넓은 복도와 기둥 이 기둥이 열을 맞추어서 늘어져 있는 것을 열주, 이 열주 옆에는 측랑이 있고, 또 끝 공간에 재단이나 기도실을 설치하기도 했다.
가톨릭에서는 이 바실리카를 교황이 인정한 특별한 성당들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기도 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대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성당은 단 4개밖에 없다고 한다.

바실리카의 형식으로 로마에 처음 지어진 몇 개의 교회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옛 성 베드로 대성당, 살바울로 포리의 무라 산타마리아, 마주어의 산지오바니 인 라테라노가 있다. 물론 이들은 훗날 신축되거나 새로운 양식이 가미되면서 모두 처음 지어졌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 않다. 그중 가장 중요한 교회가 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 정면 나무위키 사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은 르네상스 이후에 재건된 것으로 이것과 구분하기 위해 첫 번째 지어져 훗날 사라진 교회를 옛 성베드로 대성당이라고 부른다
바실리카 형식으로 지어진 옛 성베드로 대성당은 훗날 교회 건축의 발달에 모범을 제시해 주었다. 

 

바슬리카 건축 양식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들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교회의 건축 구조가 바슬리카 양식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첫째 3개 이상의 통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둘째 친랑보다 신랑의 천장이 높아야 한다. 세 번째 중앙 통로인 신랑 상단 벽면에 채광창이 열 지어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을 때 바슬리카 양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바세리카 형식을 모범으로 서양 미술사의 교회 건축 양식은 지속적으로 진화해 갔다.
대성당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중세 고딕의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 건축도 바실리카 형식을 기본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 미술의 가장 중요한 미술사적 의의는 고대 로마의 바실리카로 교회 건축의 모범이 될 형태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건축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특히 기독교 미술이 지배적인 중세 미술은 교회 건축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교회를 장식하기 위해 회화와 조각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비엔나 창세기의 일부


초기 기독교 미술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이 바실리카뿐만이 아니다.
성경 필사본  역시 초기 기독교 미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성경이기 때문에 아주 당연히 정성스럽게 손으로 옮겼다. 이러한 필사본에는 정성스럽게 그린 세밀화들이 남아 있다.
또 이러한 필사본은 양피지에 남겨져 있었는데 송아지나 양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아주 고급 재료로 더 세밀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남겨진 세밀화들은 기독교적인 의미의 도상(이콘)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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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기독교 미술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 관용령이 공포되기까지의 300년간 걸린 기독교는 기원 1세기 초에 생겨서 역대 황제에게 계속 박해를 받았다. 로마의 국민들은 불안이 높아져 제정 말기에 가까워짐에 따라 퇴폐적 경향과 국정의 불안으로 정신적 구제를 찾는 기독교인들은 많이 늘어갔다.

기독교의 전신인 유대교가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신학자 사이에도 그의 옳고 그름을 둘러싼 논쟁이 있어 종교미술로서의 발생이 저지되었고 황제의 박해로 인해 공공연한 활동을 할 수 없었기에 1세기에서 시작되어, 5세기경 동방에서 비잔틴 미술, 서방에서는 메로빙거 왕조 미술의 시대가 출현하기까지, 주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미술을 초기 기독교 미술이라고 부른다.

 

 

 

2. 비잔틴 미술

 

비잔틴 미술은 동로마 제국의 예술품으로 4세기 경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에 이르는 시대에 나온 미술품을 말한다.

로마 제국 전역에 퍼져 있던 기독교는 게르만 여러  민족 사이에도 깊이 침투되어 있다. 로마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4세기경부터 게르만의 여러 민족이 각지에 침입하여 새로운 지배자로서 머무르게 되었다. 고대제국의 붕괴로부터 소위 로마네스크 미술이 생겨났던 10세기경까지의 사이를 넓은 의미의 중세초기라고 부르고 있다. 전기에는 강력한 통일국가도 없으며, 토지개발도 충분히 진척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지역차가 컸다. 비잔틴제국의 교회 내에지배자도 57세기에 걸쳐 점차 기독교(가톨릭)로 개종하고, 프랑크 제국을 중심으로 서구적 기독교 미술이 형성되는 길이 열렸다.  근년에는 8세기 중엽을 경계로 하여 전기를 메로빙거 왕조 시대, 후기를 카롤링거 왕조시대로 구분하여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3. 카타콤베의 미술

 

로마 주변 특히 아피아 가도를 따라 만들어진 상 칼리투스, 도미틸라, 프레테스에 있는 것이나 로마 시내의 상 아그네제, 프리실라에 있는 것이 유명하나, 나폴리, 시라쿠사, 알렉산드리아 등 로마 이외의 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로마 시내에는 신자인 귀족의 사저 지하실에 제실이 만들어져 있는 것도 적지 않았다. 박해를 피해서 숨은 사람들은 지하묘실에 제실이나 예배실을 만들어 매일매일의 신앙생활을 지켜 나갔다.

이 지하 제실을 카타콤베라고 부른다.  

자기들의 예배 장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가장 소박한 이유에서 생겨난 초기의 장식은 식물이나 신화의 세계를 묘사한 세속적인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점차 이러한 주제에 신앙적인 의미가 부여되자 단순한 장식도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초기의 것은 폼페이의 벽화 등과도 공통점이 많은 헬레니즘 미술의 기술을 이용한 것이었다. 주제는 신이나 복음서의 내용 자체가 아니고 허다한 상징을 통한 표현이 행하여졌다. 카타콤베 내부는 지하에 여러 층을 이루면서 종횡으로 뚫린 갱도를 파서 주위 벽면 곳곳에 사자를 모시는 감실을 배치하고, 여기저기 광장을 만들어 이곳을 그들이 예배 장소로 사용하였다. 벽이나 천장은 벽화나 부조를 이용하여 장식하고 있다. 지하 제실의 장식은 에트루리아 시대의 옛날부터 있었던 습관이다. 카타콤베의 장식 양식은 시대적으로도 변천을 겪었다. 목자, 포도 무늬, 어린 양 등은 성서에서 유래된 것과 전원 풍경과 로마 신화에서 취재된 낙원의 그림 등이 주된 표현은 헬레니즘 미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이 외에 공작, 성령이나 죽은 자의 영을 천상으로 옮기는 사자로서의 비둘기, 부활을 의미하는 불사조 등이 기독교적 상징으로 자연주의적 표현에 의해 취급되었다

 

 

4. 바실리카식 교회당

 

산비탈레 성당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운 성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라테라노의 성 조반니, 성 파울로 폴리 레 무라,  마리아 마지오레 사원, 성 사비나 사원, 성 클레멘테 사원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는 바실리카식 교회당이다.

전자는 제실 이외에 보다 큰 공간이 필요하였다. 초기 기독교가 채택한 교회 건축의 한 양식은 바실리카식이었다. 고대사에 거래소·재판소 등,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공공건물 형식과 유사하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기독교 교회와 고전시대의 종교적 신전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은 후자가 단순히 신이 거처하는 집인 데 대해, 전자는 신의 주거인 동시에 신도가 그곳에 모여 예배상의 의식이나 집회를 행하는 장소였던 점에 있었다. 따라서 . 바실리카식 회당의 기원은 근년에는 교도 박해가 적었던 오리엔트 지방에 있던 교회 건축과,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방의 민가 양식이 구 바실리카에 상호 영향을 준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기둥은 네이브의 주벽을 받치기 위해 창과 평행으로 세워졌으나 아치 구조가 발전됨에 따라 기둥 사이는 넓어진다. 지붕은 처음에는 목조의 박공 형태였으나 후에 석조의 아치 구조로 발전하였다. 애프스의 돌로 된 지붕 내부 및 제실과 네이브를 구분하는 아치형 부분에는 모자이크 장식이 되어 있다.

제단 앞에는 승려가 의식을 행하기 위한 장소인 비머가 네이브와 직각으로 폭넓게 교차되어 있다. 비머는 후세, 특히 중세의 트랜세프트(좌우에 붙은 낭하)로 발전하여, 자형 플랜을 구성한다. 후기에는 비머 앞에 성가대석이 놓인다.  

 

5. 집중양식

 

로마의 성 콘스탄차는 묘실로부터 개축한 집중식의 좋은 예인 집중양식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또 다른 건축 방식으로 집중식이 있다. 로마 시대의 묘당·욕당·신전 등으로부터 발달하여, 주로 세례당의 건축양식으로 쓰였다. 오래된 것은 다 소실되었으나 이것이 비잔틴 미술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기둥의 열을 원형으로 배치하고 둥근 지붕을 씌우는 원당 또는 팔각당 형식이다. 아르메니아나 소아시아는 일찍부터 기독교국이 되었고 또 돔 형식이 발전된 곳으로써 독특한 돔 건축이 있었던 것 같다

 

6. 모자이크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폼페이나 엘코라노를 거쳐 발달된 모자이크화는 힘찬 선과 호화로움을 표현하는 점에, 새로이 세력을 넓혀가는 기독교 미술의 정신과 동방적인 취향에 적합한 바가 있었다.

5세기 초의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사원 서쪽에 신·구약 성서가 벽면에 도해되어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국가 보호하에 적극적인 태도로써 새로운 권위로 등장해 간다는 사실의 표현인데, 표현 방법은 오히려 종래의 자연적 형체를 추구하는 사실적 방법을 벗어나 인상적·추상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형체의 간결과 강조를 통하여 교의 설명을 용이한 것으로 하는 동시에, 기독교 신앙의 모체가 된 동방의 전통이기도 하였다.

이들 교회 건축은 이탈리아의 강한 일광을 피하여 두꺼운 벽으로 덮여 있으나, 이러한 큰 벽면을 메우는 데 가장 많이 쓰인 것은 모자이크였다.  초기의 작품에는 아직 카타콤베와 공통되는 헬레니즘적 목가적, 또는 장식적인 소박한 상징성을 나타내는 것이 있었으나, 4세기말의 산타 푸덴치아나에는 12 사도에 둘러싸인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거리와 골고다 언덕에 서 있는 십자가를 눈앞에 그리는 장면이 있다

 

7. 공예

 

기독교적 의미를 갖는 상징적인 도상이 그려진 유리 제기 등에 볼 만한 것이 있을 뿐이다.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조각은 거의 그 중요성이 인정되지 못하고, 주요한 것으로는 고작 <선한 목자>란 대리석상이 알려져 있다. 또한 공예에도 뛰어난 것은 드물고, 대개 로마 시대의 것을 계승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밖에 소아시아산이라고 생각되는 상아나 금공의 제기류4세기 이후 조금씩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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