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켈란젤로의 조각

        - 피에타와 다비드상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내 오른쪽에 전시되어 있고 2m에 달하는 높이와는 달리 옆면의 두께는 1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옷자락 주름의 입체감 때문에 깊이 있는 공간감이 효과적으로 나타난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의 아름다움과 예수의 죽음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메디치가가 또 물러가고 사브나롤라라는 독재자가 한동안 통치 한 후에 새로운 공화정이 성립을 했다.
그래서 새로운 공화정의 정신을 기르기 위해서 시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공화정의 상징인 궁 앞 광장에 이 다비드상을 세웠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거장의 반열에 오른 미켈란젤로는 1501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로부터 성당의 북쪽 익랑 위에 있는 부벽에 올려놓을 다윗을 조각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돌팔매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을 통해 압제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쟁취한 피렌체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담긴 작품이었다. 그는 조각의 재료로 적당하지 않다고 두 명의 조각가로부터 작업이 수십 년째 중단되어 버려진 5.5m짜리 거대한 대리석이었다.

그런데 26살의 미켈란젤로가 약 3년 동안의 기간을 거쳐서 다비디 상을 만들어냈다.
5m짜리의 거대한 조각은 10대 미소년의 모습으로 표현한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상과 달리 청년 다윗으로 조각을 했다.

그런데 6톤에 이르는 조각상을 성당의 높은 곳에 올리기가 쉽지 않았고 장엄한 걸작을 성당 부벽 같은 곳에 갖다 둘 수 없다고 판단한 오페라 델 두오모는 다비드 상이 새롭게 놓일 장소를 정하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산드로 보티첼리를 포함한 피렌체 시민 30인의 위원회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토의 결과 이 조각상을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피렌체 시청 베키오 궁전 앞에 놓기로 결정했다.
미켈란젤로의 삶중에서 가장 자유롭고 자신의 명성과 존중을 받으면서 산 유일한 시기라고 한다.

        - 고난의 시스타나 천장화

교황권의 확립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율리우스 2세 교황은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무력으로 정복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강성 교황이었다.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대형 건축과 예술에 돈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이 소위 16세기 초 로마의 르네상스의 계기가 되었다.

건축가 라만테를 불러서 성 베드로 성당을 짓게 하고 조각가 미켈란젤로, 천재 화가 라파엘로를 불렀다.
미켈란젤로에게는 율리우스 2세가 자신의 영묘 자신의 무덤의 조각을 맡겼는데 가장 좋은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서 미켈란젤로는 약 100km 떨어진 곳에 직접 가서 우마차로 항구까지 옮겨서 그리고 배에다 그걸 싣고 로마까지 그 대리석을 운반을 8개월 동안을 이 고된 작업을 했다.
그런데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가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 나서 피렌치로 돌아가버린 미켈란젤로는 볼로냐에 마지못해 다시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교황 앞에 사죄를 했었다.
교황은 조각가인 그에게 그림을 그리라는 명령을 했고 그는 여러 차례 도저히 자신을 못하겠다고 교황에게 말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할 수 없이 그는 시스티나 성당에 천장에 매달려서 고된 작업을 무려 4년 동안이나 해야 했고 그 4년 동안의 모진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서 미켈란젤로는 성당의 천장을 다 덮은 이 거대한 회화를 경이적인 속도로 마쳤다. 보통 화가들은 그 10분의 1의 크기인 벽화도 3년 동안 그렸지만 그는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을 4년이 걸린 것이다.

회화라는 장르 자체를 싫어하는 데다가 하필 천장화. 조금만 잘못 하면 회반죽이 얼굴로 떨어지기 일쑤고, 이런 과정으로 이런 천장화을 그려내려면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야 하기에 극단적인 심리적인 고통 속에서 이와 같은 대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천장 벽화는 사방에 구약의 선지자들의 그림을 그려놓고 그 가운데 천지 창조 장면을 그려놓았다.
그 핵심에 바로 신이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는 장면을 그려놓은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탄생하는 장면을 묘사를 하고 있는데 르네상스적인 휴머니즘을 이 작품 속에서도 표현하고 있었다.

 

        - 최후의 심판

클레멘스 7세는 계약서에 서명을 한 직후 하느님의 곁으로 돌아갔으며, 그 다음 교황인 바오로 3세 때에 작품이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바오로 3세는  '교황청의 최고 건축가, 화가, 조각가'로 임명하는 포고령을 반포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중앙의 예수부터가 성화에 그려지는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다 못한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그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종말 속에서 간신히 건져 올려지는 의로운 성도들이, 좌측에는 예수에게 가차없이 쫓겨나는 가짜 의인들이 그려져있다. 게다가 우하단을 보면 그렇게 내쫓긴 거짓 증인들을 악마들이 가차 없이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으며 심판을 선포하는 천사들도 이들을 혐오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실오라기도 없는 말 그대로 나체 상태였다.

1564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로마 전례를 재정립한 후 로마 전례 상 나체화를 허용하지 않기로 한 것에 따라, '비속한 부분은 모두 가려져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져 대대적인 검열 작업을 받게 되었으며,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그림의 인물에 옷을 그려 가리도록 해서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어려운 시기마다 권력자들이 자신에게 허망한 약속을 했고 또 자신이 오직 노력을 한 그 모든 것들이 좌절되는 순간순간들마다 그런 일어나서 오히려 그때마다 대작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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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절한 천재 화가 라파엘로  미술 생애

        - 라파엘로의 생애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화풍을 잘 흡수하고 또한 독창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발전시켜서 르네상스 미술을 완성했다. 르네상스의 모든 특징이 다 잘 드러난다. 주문한 작품을 모두 완성해서 주문자에게 돌려주는 타고난 성실했고 큰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만들었던 비결이었다.

라파엘로 산치오 다 우르비노는 아테네 학당이 특히 유명한데 <아테네 학당>은 에피쿠로스, 피타고라스, 안티스테네스 등 고대 그리스의 학자가 학당에 모인 것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그는 우르비노 공국의 궁정화가, 조반니 산티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11세에 당대 이름을 날리던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 들어가 도제, 조수로 활동하였다. 화가, 조각가, 건축가, 데생화가, 제도사, 디자이너로서 초기작에서 스승의 영향이 보인다. 1499년 페르지아에서 피에트로 페르지노라고 하는 화가에서 배웠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1508년에 교황 율리우스2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간 그는 그의 대표작인 아테네 학당이 포함된 프레스코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라파엘로의 특징이기도 한데, 다른 화가의 장점을 흡수하여 한 발 더 나아가는 모습이 지속적으로 보이게 된다.

라파엘로는 두 거장에게 배울 수 있는 굉장히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두 거장의 작품들로부터 그는 많은 것들을 실제로 열정을 가지고 배웠고 한편으로는 두 과장을 비롯해서 수많은 쟁쟁한 화가들로 넘쳐났던 이 피렌체에서 화가로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1500년부터 자립하여 그림을 의뢰받기 시작하였고, 1504년부터 피렌체에서 활동하였다. 1508년 로마로 건너가 교황 및 가톨릭교회의 의뢰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504년 피렌체에서 예술적 전통에 고취되면서 F.F. 바르톨로메오의 장대한 화면구성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암법을 배워 페루지노의 영향을 탈피하고 피렌체 파의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교황청의 건축과 회화, 장식 등 미술 분야에 관한 감독 책임을 맡고 있던 라파엘로는 1518년의1518년의 《레오 10세의 초상에서는 군상을 훌륭한 솜씨로 처리하여 뛰어난 초상화가임을 증명하였다. 만년에 심혈을 기울인 그리스도의 변용(바티칸)을 완성하지 못한 채 그의 위대함을 알아보고 교황 직위를 내리려 했던 추기경 레오 10세는 라파엘로가 요절하자 그를 애도하면서 국가장을 치르게 한다. 라파엘로는 현재 로마의 판테온에 묻혀있다.

성실함과 사교적인 성품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품의 의뢰를 받아 훌륭히 마무리지었다. 르네상스의 절정을 이룬 화가답게 그의 그림은 고전 미술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단정한 선과 형태, 명료한 색상, 기품 있는 인물의 자세 연출, 배치와 구도의 극한에 다다랐으며, 르네상스 미술의 최고 덕목이자 서양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교과서처럼 여기는 '우아한 아름다움(Grazia)'의 원형을 만들었다.

영향을 다빈치로부터 받았다
간결한 피라미드 구조 또는 효과적인 빛의 사용 명암법, 수프마토 기법을 그래서 경계를 회하게 하는 수프마토 기법을 다빈치가 사용했는데 그것이 또 라파엘로에게도 영향 주게 되었다.

라파일러의 다빈치에 대한 존경심은 정말 대단한 것이어서 아테네 학당에서 플라톤의 얼굴을 다빈치로 그려놓을 정도였다.

 

세레자 요한이라는 작품을 보면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오른팔 즉 성 세례자 요한의 오른팔이 근육이 발달해했다. 이것은 미켈란젤로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고 다빈치적인 요소인 빛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인물을 돋보이게 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빛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성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돋보이게 만들었고 단순히 이 두 사람을 흉내낸 것이 아니라 사실은 창조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성 세례자 요한이 상당히 아름다웠고 그리고 이 몸이 우아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이 미켈란젤로와 다비치를 흡수하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창조해낸 라파엘로였다.

 

 

❤️ 최고의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미술 생애

1475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라 아래쪽 근처에 카프레세에서 탄생을 했다.

지방의 지방 관료로 파견되어 있었던 아버지 루도비코 부오나로티와 어머니 프랜치스카 사이에서 다섯째 중 둘째로 태어나게 된다.

6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평생 그의 삶에서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처럼 남아 그의 작품 속에서도 스며들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태어나자마자 석공 부인이었던 유모에게 맡겨지게 된다.
바사리라는 지역에서 하늘에서 재능을 자기에게 주었다면 바로 그 유모로부터 석공의 아내였던 유모로부터 아마 그 재능을 물려받았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당대의 최고의 화가의 공방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거만하여 다른 친구들의 작품이 너무 하찮게 보아서 

친구와 다툼이 생기고 주먹으로 얻어맞아가지고 그의 코가 주저앉아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그때부터 갖게 되었다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그때부터 갖게 되었다

자신의 얼굴을 많은 화가들이 작품 속에 은근히 넣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한 번도 그러지 않았고  최후의 심판에 묘하게 들어가 있다.

로렌초 데 메리츠가 자신의 대에 와서 자신도 역시 할아버지처럼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을 하고 있는데 뛰어난 조각가가 나오지 않는 것 몹시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가문이 있는 그 성당에다가 조각학교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많은 고대의 작품들을 고대 조각상들을 거기다 모아놓고 도나텔로의 제자를 교장으로 앉히고 조각가를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최고의 화가인 기를란다요에게 조각의 재능이 있는 꿈나무들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때 바로 미켈란젤로가 추천을 받았다.

조각 학교에서 로렌초와 다빈치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조각 학교의 견습생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가 조각하고 있었다.
우연히 본 로렌초가 늙은 목신인데 너무 이가 고르지 않느냐 이렇게 묻게 된다.
그런데 며칠 후에 로렌초가 이 소년을 다시 만났는데 깜짝 놀라게 된다. 어린 미켈란젤로가 망치로 그 신의 이발에 몇 개를 부수고 정말 늙은 신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깜짝 놀란 로렌초는 자기가 찾았던 도나텔로의 뒤를 이을 만한 뛰어난 그런 조각가를 드디어 자기가 찾았다고 생각을 했고 그 이후에 아예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자기 집에서 키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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