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네상스 시대 회화, 그림 특징

        -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회화의 특징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과의 활발한 교류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파괴되었던 고대 로마의 문헌과 기술력을 거의 복원했던 이탈리아 반도는 이슬람 제국에 의해 동로마가 멸망했을 때 서방으로 피난한 동로마 예술가 기술자 등 지식인이 여기로 왔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고, 그 전통이 기독교 세계로 편입된 이후에도 남아 있었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로마 유적만 봐도 알 수 있듯 고대 로마의 문화는 여전히 이탈리아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북이탈리아의 파도바와 베로나는 계속하여 베네치아에게 정복당하여 신문화와 연결이 되지만 처음에는 오히려 위의 두 도시가 능동적이었다. 총독 저택을 장식한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뒤를 이어서 피사넬로는 국제 고딕 양식을 베네치아에 가지고 가서, 우아한 성모자(聖母子), 공상적인 의상, 우화동물 등 장식 문양적인 표현이 북이탈리아에 퍼졌다.  

알베르티, 브루넬레스키가 건축에서, 그리고 기베르티, 도나텔로가 조각에서 이룬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이 회화에 있어서는 마사초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사리의 열전(列傳)에 기술된 것처럼, 그가 프레스코화를 그린 피렌체에 있는 카르멜회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회는 많은 르네상스 화가들의 수업의 도장이 되었다.

마솔리노와 같은 화가가 베네치아에 머물면서 신경향의 양식도 전했던 것이다. 필리포 리피, 우첼로, 카스타뇨 등 피렌체의 화가들은 북이탈리아에서 한때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1306년 조토가 스크로베니 경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1443년~1453년 10년간 도나텔로가 산토의 주제단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을 제작하였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피렌체 파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여 르네상스 미술의 주류를 이루었던 피렌체 파는14세기로부터 16세기 동안 회화에서는 주제에 관련이 있는 것만을 단순화하고, 또 이를 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마사초, 브루넬레스키 등의 투시도적 수법과 도나텔로의 조형적 성과를 도입한 다음부터는 회화적 현실의 표현에 신천지를 개척하였다.

장식적인 시에나 파와 대립하였고 ‘공간 구성은 화면 안의 통일이다라는 고딕과는 다른 형식의 회화를 만들어냈다.  

자연주의는 1400년대 예술의 주류가 되었으며, 자연과학의 발흥과 더불어 인체묘사·운동묘사·풍경묘사 등에서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한 피렌체 파의 사실적 성과는 메디치가의 번영에 힘입어 르네상스 회화 발전의 주류가 되었다. 

1500년대에는 보티첼리는 만년에 이르러 이상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보여주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사실주의를 완성하면서부터 주관적 정신 내용을 그 속에 표현하였다. 

바로크 양식의 선구자가 된 미켈란젤로는 강인한 인체 표현 속에 인간의 정신적 고뇌를 표현하였는데, 그 초월적 방향으로써 피렌체파의 최종적 단계를 장식하였.

처음에는 르네상스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일어났지만 피렌체 출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영향으로 과학을 바탕으로 한 이성적인 성격도 아주 강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회화의 네 가지 혁신 중에서 세 가지인 원근법, 명암법, 피라미드 구조가 이때 아주 명확하게 나타났다.

르네상스의 목적은 미술의 수단이 아닌 미술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는데 과학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림으로써 미술의 권위를 격상시켰다.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북유럽에도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북유럽에서는 유화를 발명한 얀바 네이크, 독일의 할스 홀바인과 듀러 등이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유화가 발명되면서 세심한 표현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보다 더 사실적인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전성기 르네상스에서 원근법, 명암법 등 법칙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독창성과 개성을 위주로 회화가 발전하였다.

     -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베네치아파

정확한 시기를 몰라 수수께끼에 싸인 《태풍》(1505?)은 폐허가 된 어느 조용한 촌락을 배경으로 하여, 바른쪽 잔디 위에서 젖을 물린 나체의 부인이 앉아 있고 왼쪽 끝에 젊은 병사가 서 있다. 때마침 구름은 낮게 깔려 있으며 번개마저 번쩍인다.  이 그림을 그린 조르조네는 조반니 벨리니 이래 색채를 구사하여 특이한 화풍을 세운 베네치아파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그리스의 화가라 명칭 되는 페아레스라면 어느 누구든 그릴 수 없는 태풍을 그렸다는 것은 고대의 기록에 대한 도전이라 여겼다. 

그의 잠자는 비너스는 밝은 광채 아래 풍만한 미를 드러내어 놓고, 그리스의 조각가도 미치지 못하는 관능미를 현실화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탈리아 반도가 나폴리와 교황령을 제외한 수많은 도시국가와 소국들로 분열되어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지 못했고 중세 유럽을 지배하고 중세 사람들의 삶을 결정짓던 대표적인 체제인 봉건제가 유독 이탈리아에서는 발전하지 못했기 가능했다

 

12세기부터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무슬림 해적을 소탕하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에 지중해를 장악하여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중계무역 특성상 여러 나라의 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높기 때문에 많은 문물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도시의 상인들은 부와 힘을 얻고 교양과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조르조네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는 평온한 정원의 정서를 베네치아 시민의 실내로 바꾸어, 한층 더 화려한 색채의 음악적 표현을 더하였다.

계란이 섞이는 프레스코화에 맞지 않는 항구인 베네치아에서는 비잔티움의 모자이크가 애호되었는데, 

나중에는 북방에서 전래한 유채화법이 베네치아에서 채용되어 회화 역사상 큰 변화를 몰고 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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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 시대 미술

        -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개념

중세를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잡는 의견은 다양한데 보통 1453년의 동로마 제국의 멸망이나 1521년의 루터교회의 출현으로 잡으며 1304~1374의 페트라르카의 시대가 중세라는 의견이 많은 편이다.

 

르네상스 미술은 1400, 그러니까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이탈리아에서 철학, 문학, 음악, 과학, 기술의 발전을 같이 하면서 서유럽에서 일어난 문화계의 변화한 현상으로 회화, 조각, 공예 등에서 생겨났다.

르네상스는 예술의 부활이라는 의미로 미술이 수단으로 여겨지던 중세 미술에서 탈피하여 미술의 그 자체를 인정해 주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로 돌아가자는 의미이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기본적인 성격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복원을 추구한다.  그래서 문예 부흥으로 번역된다. 

용어로서 르네상스의 의미는 '재생', '부활'이며 그 어원은 조르조 바사리의 책 1550년의 예술가 열전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그리스와 로마의 재림이라 하여 이탈리아어로 리나시타(rinascita, 부활)이라 거론한 것이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 중심이었던 중세 봉건 사회가 붕괴되고 상공업을 통한 근대 도시가 발달하면서 신 중심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가치가 변화했다. 이때부터 신을 위한 미술이 아닌 인간과 자연의 현실 세계를 위한 미술을 과학적인 법칙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일반적으로는 중세적인 문화가 쇠퇴하고 근세적인 문화가 성립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교황권이 약화되고 중세 흑사병 등과 도시의 발달 등으로 봉건 제도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문화 변화로, 그렇게 중세적 문화를 부정하고 근세적 문화를 성립했다고 생각된다.

프랑스의 역사가였던 쥘 미슐레가 '르네상스(Renaissance, 재탄생)'(re, 다시 + naissance, 탄생)으로 번역하고, 스위스의 역사가였던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확실하게 정의 내린 것이다.

 

돈의 논리 혹은 배금주의와 반대에 있는 인문주의는 인간다움을 중요시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는 인간주의, 인문주의라고 하기도 하며, 인도주의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따라서 '인간애'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부르크하르트는 인문주의자들이 신이 모든 것의 중심인 기독교의 신본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였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절로 회귀하려 한 운동, 즉 인문주의라고 해석했다. 다만 르네상스식 인문주의가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인간'을 의미한다는 해석에는 많은 반론이 쌓여있다.

 

그 반론으로는 예술과 문화에서의 성취가 개인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문명화’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미슐레, 부르크하르트, 페이터는 르네상스를 역사의 한 시대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신으로 바라보는 19세기식 개념을 만들어냈다. 르네상스를 이런 식으로 정의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는데, 15세기부터 계속된 현상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설명을 제시하기보다 그것을 19세기 유럽 사회의 이상향으로 설명한다

 

❤️ 르네상스 시대 회화의 혁신

르네상스 회화에서는 4가지의 혁신이 나타나게 되었다.


첫 번째 혁신은 멀고 가까운 것을 표현하여 공간감을 나타나게 해 준 원근법이다.
원근법은 브루넬레스키라는 건축가에 의해 처음 발명 되었다. 원근법이란 하나의 소실점을 기준으로 우리 눈에서 가까운 것은 크게 먼 것은 작게 그리는 방법으로 1차원의 평평한 그림에 3차원의 입체적인 공간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 혁신은 밝고 어두움을 통해 입체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명암법이다. 먼저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에 그려진 수태고지 그림으로 명암법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중세 시대의 고딕 양식으로 그려졌던 이 수태고지는 선을 위주로 평평한 느낌이 드는 반면에 르네상스 시대의 이 스테고지는 명암법을 통해 어두운 곳과 밝은 곳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입체감이 느껴진다.

세 번째 혁신은 그림의 세밀한 표현을 가능하게 해 주고 내구성을 높여준 유화의 발견이다.
유화는 얀반 에이크라는 화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전에는 가루 형태인 물감 안료를 계란 노른자나 벌꿀에 개어서 사용하는 템페라라는 물감을 사용하여 금방 물감이 썩어버리거나 떨어져 버려 내구성이 낮고 정도가 낮아서 표현이 어려웠다.
얀반 에이크가 계란 노른자 대신 기름을 섞어서 써보았더니 훨씬 내구성도 좋고 부드럽고 세밀한 표현이 가능해지고 그림의 퀄리티가 훨씬 좋아지게 되었다.
네 번째 혁신은 수학적인 비례를 통해 안정적인 느낌을 준 피라미드 구도이다.
피라미드 구도란 마사치오라는 화가에 의해서 보완된 구도로 마치 이집트에 있는 피라미드처럼 그림을 배치하는 방식이다.
피라미드 구도는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암굴의 성모라는 이 작품에서도 이렇게 피라미드 구도가 들어있다.

이러한 피라미드 구도는 황금 비례와 마찬가지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정적인 느낌을 받게 한다.

 

❤️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화파의 특징

        - 피렌체 화파

이탈리아에 로마의 유적과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기도 했고 교황이나 군주 등 예술의 후원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르네상스의 주요한 화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마사치오의 아담와 이브의 낙원추방


먼저 피렌체 화파는 마사치오라는 화가를 중심이며 그림에서 인물을 중심에 두었고 명확한 윤곽선을 통해 정확한 형태와 양감을 표현하고 안정적인 구조로 꽤나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에 의해 그림을 그렸다.

 

       - 베네치아 화파

 

조르조네의 폭풍

베네치아 화파는 조르조네라는 화가를 중심으로 그림에서 인물보다는 풍경 중심으로 형태나 이성보다는 현실주의적인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다.
피렌체 화파와는 사뭇 다르게 빛이나 색 분위기를 중점으로 두며 역동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는 등 상당히 감성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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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시대  고딕 건축 양식과 미술

        - 고딕 건축의 역사

고딕 건축 양식은 주로 12세기에서 14세기 유럽에 유행했던 건축 양식이다.
기독교의 최절정기 그래서 중세인들의 신앙심이 극명하게 표현되었던 건축 양식이 바로 고딕 양식이다.
순례 열풍과 함께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이 지어졌고 로마네스크 이후부터 르네상스가 본격화되기 시작하기 전까지의 유럽에서 유행했던 양식을 고딕 건축 양식이다.
원래 고딕이라는 말이 르네상스 시기에 이탈리아인들이 보기에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워져 있던 고딕 건축들이 조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에 조르조 바사리라는 미술 사학자가 있었다.
이 사람은 화가이자 건축가이기도 했는데 바사리는 로마네스크 다음의 시기를 마니아였고 고딕을 예전에 야만적인 게르만 민족 중에 고트족이 있었는데 바로 이런 고트족의 양식이라 하였다.
이 바사리의 시대에는 이탈리아가 미술의 중심지였고 그리스 로마와 같은 이제 고전 미술이 최고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사람인 이 바사리의 눈에는 프랑스 중심의 이런 양식이 천박하게 보였던 것이다.

 

12세기말, 고딕 건축이 발달하면서 덩달아 발달했다. 프랑스에서 처음 유행한 이래로 서유럽 전반과 알프스 북부에 두루 퍼졌으며,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미술 양식이 되었다. 지역 차이는 있으나, 고딕 미술 운동은 15세기경까지 계속되어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 고딕 건축 양식의 세 가지 양식


고딕 양식에는 세 가지 요소만 체크하면 된다.
먼저 첨부 아치, 플라잉 버트레스, 리브 볼트 이 세 가지를 필수적으로 알게 되면 유럽에 가셔서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을 구분해서 알 수가 있다.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두껍고 넓은 벽면이 제거되고 크고 높은 들창의 형성이 가능해지자 스테인드 글라스가 발달하였다.

13세기까지의 기술은 주로 모양에 맞추어 자른 색유리를 H자형 단면을 가진 납 테에 끼워 한 장의 그림을 조립하고 필요에 따라 쇠 테로 보강하여 창으로 시공하였다. 이것은 게르만 켈트의 전통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긴 중세의 역사를 통하여 발달하여 온 소공예(칠보 등)의 색면 대비의 아름다움에, 투과광의 영롱함을 결부시켜 대예술로 발전을 본 것이다.
둥근 모양 아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는 내부 안에 기둥들이 아취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고딕 양식으로 들어오게 되면 이런 아치들이 뾰족해지는 중간이 뾰족해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대표적인 성당이라고 할 수 있는 랭스 성당, 노트르담 성당들을 다 입구가 첨두아치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피사의 대성당과 프랑스 앙굴렘 성단과 입구 자체 외관 자체가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반면에 랭스 성당과 노트르담 성당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두 성당을 보면 이와 같이 첨두아치 끝이 뾰족한 첨두아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고딕 양식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르트르 대성당은 신랑의 높이 즉 주 건물 주 본당의 높이가 36.55m이고 종탑의 높이는 113m가 된다.

 

 

또 랭스 대성당은 신랑의 높이가 즉 주 성당의 높이가 38m고 종탑의 높이가 81m이다.
그러니까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들을 보게 되면 그들의 하늘을 향한 뜨거운 신앙심을 이렇게 열정적으로 건축 안에 심어놓았다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높이 솟은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팀목이 필요하고 플라잉 버트리스라고 하는 버팀목이 반드시 들어갔다.

일단 두껍게 만들어 세우고 그다음에 이와 같이 부벽을 대고 그 아래에 낮은 건물을 지어가지고 주벽을 유지했죠. 거기에 공중 부벽을 대어둔다. 이 공중부벽이라는 게 바로 플라잉 버트레스이다. 이 벽은 낮은 건물을 지어서 보정을 하고 첨탑을 지어서 첨탑으로 이 부벽의 높은 부분이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힘을 받쳐주는 형태 이것을 일컫는 것이다.


본당의 벽에 창문이 굉장히 크게 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퀼른 대성당은 창문이 크게 났고 천장이 높게 만들어서 그들의 신앙심을 표현했고 그 안에 빛으로 채워서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하고 싶어 했다.
그 벽 위에 넓은 창들이 스테인 글라스를 통해서 빛을 받아서 성당에 아주 신비한 그런 느낌으로 빛을 쬐는 것이다.


랭스 대성당의 외관은 너무나 웅장한데 재단이 있는 엡스라고 하는 부분은 바깥에서 보면 첨탑이 올려져 있다.
건물의 외벽을 따라서 첨탑과 플라잉 버트레스가 건물을 지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큰 창문들이 계속 이어져 있으며 이 창문에서 스테인글라스를 통해서 빛이 비쳐서 건물 안이 환하면서도 신비한 빛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을 가진 건축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세 번 째는 리브 볼트인데 늑골 궁륭이라 불린다.
고집 건축은 정상의 높이만 30~40m 이상 되기 때문에 천장이 돌로 된 천장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얇은 갈비뼈 같은 그런 기둥들을 많이 필요하다.
이 천장에 첨두 아치 형태의 얇은 갈비뼈와 같은 기둥들이 밑에까지 내려와서 하중을 천장으로부터 내려온 하중을 견디게 만드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고딕 양식이 오게 되면 리브 볼트 양식은 천장에 얇은 기둥들을 세워서 하중을 분산시키는 그런 전형적인 고딕 양식의 교회를 볼 수가 있다.
어두운 성당 안은 영롱하게 비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색과 빛 속에 완전히 종교적인 분위기가 넘치게 되었다. 전형적 작품 예로 샤르트르 대성당의 150개에 가까운 크고 작은 창이 모두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다.

 

이 시기에는 사실적 경향의 발달과 더불어 순수한 공예는 점점 쇠퇴하나 사본류는 13세기의 파리를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교회에 귀속하는 것보다 귀족의 주문에 의한 것이 많고 랭부르 형제의 작품인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는 그 좋은 예이다.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고딕 회화는 후에 플랑드르 파의 탄생을 맞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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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네스크 시대 미술

        - 로마네스크 시대란?

0세기부터 12세기(지역에 따라서는 13세기 전반까지를) 로마네스크 시대라 부른다. 

넓은 영토를 가진 프랑크제국이 분열되고, 노르만인, 사라센인 등의 거듭되는 침입으로 서유럽에 혼란과 공백이 계속되는 사이에 각지의 봉건 제후는 세력을 강화하고 고대 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로마네스크라는 칭하며 각지에서 부흥한 수도원을 단위로 해서 창조되는 것이 각광받는 일이 생기며 중앙집권제는 붕괴되었다.

로마네스크 미술은 대략적으로 기원후 약 1,000년부터 고딕 양식이 13세기 이후에 나타날 때까지의 서유럽의 미술을 말하며 두꺼운 석조의 벽체(壁體), 아치, 돔을 가진 건축에 끼친 고대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로마네스크(로마풍)라는 건축 양식이 대표적인 사항이다.

 

 

        - 로마네스크 시대의 역사적 사건

AD 395년에 동서 로마가 분열을 하고 동로마 제국은 분열되어서도 천년 이상은 유지가 되지만 서로마 제국은 금방 망했다. 그것은 라인강 북쪽에 있었던 게르만 민족들이 밀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게르만. 민족은 그들 옆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훈족 때문에 서쪽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기존의. 서로마 제국 영토를 게르만 민족들이 차지하게 되면서 이제 중세가 시작이 되는데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프랑크 왕국이 지금의 유럽 전체를 통일하게 되었다.

교황은 800년에 카를로스 대제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 서로마 제국의 전통을 잇는 황제가 된다. 오늘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대체적인 모습이 9세기 또는 10세기 경에 완성이 되었다. 5세기에서.5세기에서 10세기 중세인들은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 삶의 근본적인 해답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생겼고 내세의 천국으로 갈 수 있다면 그들은 현실을 감내할 수가 있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가려면 죽기 전에 일생 동안 저지른 죄를 용서받아야 된다고 믿었고 성지 순례는 가장 확실한 참여의 방법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당시에 그 험한 길들 미지의 길들 그리고 온갖 도적과 강도와 온 위험이 산재해 있는 그곳을 그들은 열정 종교적인 신념을 가지고 그 길을 찾아갔었던 것이다. 그런데 11세기 들어오게 되면 십자가 운동으로 성지순례 운동이 막히게 되었다.

그 와중에 뜻밖에도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장소가 중세 유럽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산티 야곱의 콤포스텔라이다. 야고보 성인이 예루살렘에서 순교를 당한 후에 제자들이 빈 배에 시신을 실어 보냈는데 그 배가 스페인 해안까지 떠내려왔고 거기에 어느 곳에 묻혀 있다가 800800년에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발굴됐다. 그 소문이 유럽에 기독교인들에게 퍼지자 산티아고 데 코페스타라까지 가보자 하는 순례 행렬이 붐을 이루게 된다. 본래의 예루살렘과 또는 로마 레지아가 있는 순례의 목적지였는데 이제 새롭게 산테아고도의 코페스테라라고 하는 새로운 목적지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묻혀 있는 이곳이 새로운 순례길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야고보 성인의 별이 빛나는 들판이라는 뜻이 산티아고 데 콤베스텔라이다.

산티아고 대 콘페스텔라에 세워진 성당이 최종적인 순례의 목적지가 되었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내  4개의 출발점은 모두 성당에서 출발을 하게 되겠다.이와 같은 순례 열풍은 수많은 편의시설을 제공해야 하고 편의시설을 만들다 보면 새로운 도시들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다음에 기존의 도시들도 새로운 순례객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대규모 성당을 짓고 또 도시의 모습을 새롭게 꾸미고자 하는 그런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 유럽의 11세기 12세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새로운 성당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 로마네스크 시대의 건축 양식과 대성당

 11세기 12세기에 이처럼 새로운 형식의 교회를 짓고자 하는 그 사람들이 어떤 일정한 형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지어졌던 교회들을 일컬어서 로마네스크 건축이라고 하는 것이다.

로마네스크라는 말은 뭐냐면 로마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따라와서 교회를 지었다 해서 로마를 닮은 로마식의 로마네스크 건축이 유행하게 되는 것이다. 로마의 건물 그러면 여러분 콜로세움을 대표적으로 떠올리게 되는데 콜로세움의 대표적인 건축 구조하면 아치를 말하겠다. 피사의 대성당이 보게 되면 아치의 연속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

아치는 위가 둥근 모습을 하고 아치가 길게 공간을 확보한 형태를 베롤 볼트라고 했다. 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들을 보게 되면 이렇게 둥근 천장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볼트 천장을 가진 긴 복도를 가지고 있는 건물이 지어지게 된다. 천장을 돌로 된 볼트 천장으로 만들고 돌을 이 위에 얹어놨기 때문에 하중이 많아졌다. 이것을 견디기 위해서 기둥과 벽이 두꺼워지고 상대적으로 이 하중을 견뎌야 되기 때문에 창문을 크게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실내가 약간 어두운 형식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이 지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공인 이후에 로마의 공공 회당이었던 바실리카 형식의 예배당을 지었던 것과 대조가 되는데 바실리카 양식은 우선 천장이 나무로 되어 있고 그에 비해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은 볼트식의 모양을 가지고 하중을 견디기 벽과 기둥들이 두꺼워야 했다.

안에 공간 볼트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은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아치가 길게 공간을 확보한 채 펼쳐져 있는 것을 볼트라고 하고 베롤 볼트라고 합니다. 그런데 양쪽으로 교차되는 볼트를 그로인 볼트라고 하는데 그로인 볼트 위에 돔이 이렇게 세워지거나 아니면 이 위에 종탑이 만들어졌다.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 성당인데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는 또 이렇게 종탑을 따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피사의 대성당과 피사의 사탑

우리가 알고 있는 피사의 사탑은 사실은 피사 대 성당의 부속물로 깔려 있는 종탑이다. 로마네스크의 앞쪽에 창은 원형으로서 장미와 차륜 그러니까 바퀴 모양의 어떤 구조물을 사용해서 채광이 될 수 있도록 빛이 들어오게 하고 그 모습을 좀 신성하게 만들어 놓았다. 산티아고 순례길과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은 동시대에 같이 있었던 사회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로마네스크의 조각은 고전적 조형의 전통을 가진 남부 지방인 프랑스나 에스파냐가 전개의 중심지로 교회 건축의 일부를 이루는 주두나 팀펀(입구 상부의 아치를 막는 반원형의 석판), 또는 입구의 옆쪽과 제실의 외벽 등의 공간을 메우고 있는 조각이 가장 잘 대표적이다.

11세기 중엽 이후의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에 속하는 일파의 활동 영향은, 중세조각의 양식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오턴, 베를레, 소류 등 클뤼니 파()의 사원은 오늘날 로마네스크 조각의 보고가 되어 있다. 신의 모습을 공공연히 표현하는 것은 종래의 기독교 미술 중에는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문맹의 농민에 대한 포교 장소가 되어 있던 교회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한 신이나 성서의 이야기가 많은 곳에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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