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네스크 시대 미술

        - 로마네스크 시대란?

0세기부터 12세기(지역에 따라서는 13세기 전반까지를) 로마네스크 시대라 부른다. 

넓은 영토를 가진 프랑크제국이 분열되고, 노르만인, 사라센인 등의 거듭되는 침입으로 서유럽에 혼란과 공백이 계속되는 사이에 각지의 봉건 제후는 세력을 강화하고 고대 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로마네스크라는 칭하며 각지에서 부흥한 수도원을 단위로 해서 창조되는 것이 각광받는 일이 생기며 중앙집권제는 붕괴되었다.

로마네스크 미술은 대략적으로 기원후 약 1,000년부터 고딕 양식이 13세기 이후에 나타날 때까지의 서유럽의 미술을 말하며 두꺼운 석조의 벽체(壁體), 아치, 돔을 가진 건축에 끼친 고대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로마네스크(로마풍)라는 건축 양식이 대표적인 사항이다.

 

 

        - 로마네스크 시대의 역사적 사건

AD 395년에 동서 로마가 분열을 하고 동로마 제국은 분열되어서도 천년 이상은 유지가 되지만 서로마 제국은 금방 망했다. 그것은 라인강 북쪽에 있었던 게르만 민족들이 밀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게르만. 민족은 그들 옆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훈족 때문에 서쪽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기존의. 서로마 제국 영토를 게르만 민족들이 차지하게 되면서 이제 중세가 시작이 되는데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프랑크 왕국이 지금의 유럽 전체를 통일하게 되었다.

교황은 800년에 카를로스 대제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 서로마 제국의 전통을 잇는 황제가 된다. 오늘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대체적인 모습이 9세기 또는 10세기 경에 완성이 되었다. 5세기에서.5세기에서 10세기 중세인들은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 삶의 근본적인 해답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생겼고 내세의 천국으로 갈 수 있다면 그들은 현실을 감내할 수가 있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가려면 죽기 전에 일생 동안 저지른 죄를 용서받아야 된다고 믿었고 성지 순례는 가장 확실한 참여의 방법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당시에 그 험한 길들 미지의 길들 그리고 온갖 도적과 강도와 온 위험이 산재해 있는 그곳을 그들은 열정 종교적인 신념을 가지고 그 길을 찾아갔었던 것이다. 그런데 11세기 들어오게 되면 십자가 운동으로 성지순례 운동이 막히게 되었다.

그 와중에 뜻밖에도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장소가 중세 유럽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산티 야곱의 콤포스텔라이다. 야고보 성인이 예루살렘에서 순교를 당한 후에 제자들이 빈 배에 시신을 실어 보냈는데 그 배가 스페인 해안까지 떠내려왔고 거기에 어느 곳에 묻혀 있다가 800800년에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발굴됐다. 그 소문이 유럽에 기독교인들에게 퍼지자 산티아고 데 코페스타라까지 가보자 하는 순례 행렬이 붐을 이루게 된다. 본래의 예루살렘과 또는 로마 레지아가 있는 순례의 목적지였는데 이제 새롭게 산테아고도의 코페스테라라고 하는 새로운 목적지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묻혀 있는 이곳이 새로운 순례길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야고보 성인의 별이 빛나는 들판이라는 뜻이 산티아고 데 콤베스텔라이다.

산티아고 대 콘페스텔라에 세워진 성당이 최종적인 순례의 목적지가 되었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내  4개의 출발점은 모두 성당에서 출발을 하게 되겠다.이와 같은 순례 열풍은 수많은 편의시설을 제공해야 하고 편의시설을 만들다 보면 새로운 도시들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다음에 기존의 도시들도 새로운 순례객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대규모 성당을 짓고 또 도시의 모습을 새롭게 꾸미고자 하는 그런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 유럽의 11세기 12세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새로운 성당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 로마네스크 시대의 건축 양식과 대성당

 11세기 12세기에 이처럼 새로운 형식의 교회를 짓고자 하는 그 사람들이 어떤 일정한 형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지어졌던 교회들을 일컬어서 로마네스크 건축이라고 하는 것이다.

로마네스크라는 말은 뭐냐면 로마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따라와서 교회를 지었다 해서 로마를 닮은 로마식의 로마네스크 건축이 유행하게 되는 것이다. 로마의 건물 그러면 여러분 콜로세움을 대표적으로 떠올리게 되는데 콜로세움의 대표적인 건축 구조하면 아치를 말하겠다. 피사의 대성당이 보게 되면 아치의 연속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

아치는 위가 둥근 모습을 하고 아치가 길게 공간을 확보한 형태를 베롤 볼트라고 했다. 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들을 보게 되면 이렇게 둥근 천장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볼트 천장을 가진 긴 복도를 가지고 있는 건물이 지어지게 된다. 천장을 돌로 된 볼트 천장으로 만들고 돌을 이 위에 얹어놨기 때문에 하중이 많아졌다. 이것을 견디기 위해서 기둥과 벽이 두꺼워지고 상대적으로 이 하중을 견뎌야 되기 때문에 창문을 크게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실내가 약간 어두운 형식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이 지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공인 이후에 로마의 공공 회당이었던 바실리카 형식의 예배당을 지었던 것과 대조가 되는데 바실리카 양식은 우선 천장이 나무로 되어 있고 그에 비해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은 볼트식의 모양을 가지고 하중을 견디기 벽과 기둥들이 두꺼워야 했다.

안에 공간 볼트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은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아치가 길게 공간을 확보한 채 펼쳐져 있는 것을 볼트라고 하고 베롤 볼트라고 합니다. 그런데 양쪽으로 교차되는 볼트를 그로인 볼트라고 하는데 그로인 볼트 위에 돔이 이렇게 세워지거나 아니면 이 위에 종탑이 만들어졌다.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 성당인데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는 또 이렇게 종탑을 따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피사의 대성당과 피사의 사탑

우리가 알고 있는 피사의 사탑은 사실은 피사 대 성당의 부속물로 깔려 있는 종탑이다. 로마네스크의 앞쪽에 창은 원형으로서 장미와 차륜 그러니까 바퀴 모양의 어떤 구조물을 사용해서 채광이 될 수 있도록 빛이 들어오게 하고 그 모습을 좀 신성하게 만들어 놓았다. 산티아고 순례길과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은 동시대에 같이 있었던 사회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로마네스크의 조각은 고전적 조형의 전통을 가진 남부 지방인 프랑스나 에스파냐가 전개의 중심지로 교회 건축의 일부를 이루는 주두나 팀펀(입구 상부의 아치를 막는 반원형의 석판), 또는 입구의 옆쪽과 제실의 외벽 등의 공간을 메우고 있는 조각이 가장 잘 대표적이다.

11세기 중엽 이후의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에 속하는 일파의 활동 영향은, 중세조각의 양식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오턴, 베를레, 소류 등 클뤼니 파()의 사원은 오늘날 로마네스크 조각의 보고가 되어 있다. 신의 모습을 공공연히 표현하는 것은 종래의 기독교 미술 중에는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문맹의 농민에 대한 포교 장소가 되어 있던 교회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한 신이나 성서의 이야기가 많은 곳에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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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잔틴 시대 미술

        - 비잔틴 시대 미술의 역사적 흐름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인 콘산티노플로 옮긴 것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395년 로마 제국의 동서로 분열되었고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이 시점이 서양 중세의 시작으로 중세는 1400년까지 1천 년 동안 이어진다.

반면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의 역사는 1453년까지 이어진다.

서양 미술사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인정한 시점부터 동서 로마 제국의 분열 이후 서로마 제국 지역에서 나타난 점들을 역사적인 맥락으로 서술하고 있다.

로마제국은 영토가 너무 넓어져서 4등분 하여 다스리게 되었다. 아시다시피 로마는 끊임없이 영토를 넓히다 보니까 나중에는 너무나 이 영토가 비대해져 가지고 황제 혼자서 도저히 다스릴 수가 없어 4명의 황제를 나누어주는 사분령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4명의 황제가 나중에는 6명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까 황제 중 한 명이었던 콘스탄티누스라는 황제가 다른 황제들을 정리하고 강력한 경쟁자인 막센티우스하고 최후의 일전을 하여 콘스탄티누스가 라바룸이라 표식을 천사에게 받아서 결국 막센티우스를 이겨서 서쪽 로마 지역의 대권을 잡았다.
서로마의 단독 황제가 된 콘스탄티네스는 동남아 황제는 서로마 황제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합의 하에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내리고 결국 동쪽에 있던 황제마저도 굴복시키고 드디어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서쪽에서는 게르만족이 자꾸 침략을 하고 그리고 동쪽에서는 페르시아인들이 자꾸 침략을 했다. 그러다 보니까 콘스탄티누스가 수도인 로마를 떠나서 당시에 경제적인 중심지이자 전략적인 요충지인 이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이전을 했다.
이 비잔티움이 오늘날의 터키에서도 이스탄불이다.
비잔티움을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해 콘스탄티노풀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
서쪽 지역이 통치자가 비어버리니 서쪽 지역에다가 황제를 한 명 두고 다스리게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로마 제국은 두 곳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게르만족이 서쪽 지역에서 계속 밀고 내려오다 보니까 결국 476년에는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이제 폐위돼 버리고 게르만족에 의해서 결국 서로마는 망했다.
서로마는 망했지만 기독교는 그대로 남아서 오히려 서로마 기독교의 책임자인 교황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다.
동서가 이렇게 분열되었지만 완전히 남남이 된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관계는 유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 비잔틴 시대 미술의 특징 

      - 비잔틴 시대 미술의 실제 표현 방법과 특징

초기 기독교인들은 우상이나 신상을 떠올리게 하는 조각상 제작에는 반대를 했다.
하지만 회화는 성경의 내용을 전달해주는 기능을 하니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결국 6세기 말에 서로마에 있는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이를 지지해 준다.
하지만 그냥 아무렇게나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정해진 규칙이 있었다.
조건: 단순하게 그리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는 요소들은 배제하자 그래서 결국 사실성에 입각한 그림들은 꺼려지게 되었다.
바로 모자이크가 유행하게 된 이유가 생겨났다.
기독교 미술 초기에는 모자이크가 유행했는데 여기에서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은 모자이크가 유행한 이유로서는 첫 번째가 헬레니즘 시기의 영향이라 할 수 있고 헬레니즘 시기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모자이크를 많이 이용해서 대중화시켰다. 그런 점에서 그림보다 비싸니까 나는 이만큼 부유하다.라고. 부의 과시가 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당시 미술 양식의 영향이라고 되어 있는데 모자이크는 돌이나 유리 조각을 자른 것이라서 아무리 잘 만들어봤자 회화보다 사실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독교 미술에서는 이제 더 이상 사실성이 중요하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모자이크의 투박함도 용인이 될 수 있다.
세 번째로 신비로운 이미지라고 했는데 기독교 이전의 신들은 인간성도 갖고 있고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우며 여러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은 인간적인 모습도 있고 자연적이고 구체적인 존재였지만 기독교의 신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뭔가 신비로운 이미지를 사람들이 추구하게 되었다.
모자이크는 의도적으로 표면을 울퉁불퉁하게 만들어 가지고 빛이 반사되니까 빛의 반사에 따라서 신비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질 수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

가운데의 예수님이 계신 이 모자이크는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한다.
5개의 빵과 두 개의 물고기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신 기적을 나타낸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일단 이 예수님이 입으신 옷은 로마의 황족을 상징하는 자주색 의상을 입고 있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빵과 물고기를 지금 받고 있다. 그런데 받는 장면을 가만히 보면은 직접적으로 손을 터치하는 게 아니라 제자들이 옷으로 손을 가린 채 물건을 받고 있다.
이것은 당시 일반인들이 황제의 손에 직접 접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걸 막으려고 이런 식으로 손에다 무엇인가를 감싸고 했다고 한다. 이게 바로 반영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여기서는 예수님이 황제의 모습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옷주름을 보면 예수님에게서 뭔가를 받으려고 팔을 틀었는데 거기에 따라서 옷주름들이 이렇게 세부적으로 이렇게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바위들을 보면 여러 가지 색깔을 칠해가지고 어느 정도 입체감을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이걸 만든 사람은 그리스 미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다만 단순 명확하게 만들으라는 원칙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충실하게 이걸 제작했다.

 

❤️ 서로마 동로마의 갈등과 비잔틴 미술

        - 서로마와 동로마의 갈등

서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그림으로 성경의 내용을 묘사하는 것은 허용했다
서로마 쪽은 더 이상 논란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동로마 쪽은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서로마는 교황이 기독교의 총책임자이고 성직자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에 반해서 동로마는 세석권과 기독교를 모두 틀어쥐고 있는 사람은 황제였다.
그런데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가 730년에 성상 숭배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조각상은 물론이고 이제 페어로도 그리스도나 성녀 등을 그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걸 자신들뿐만 아니라 서로마에도 강요를 했다.
당시 동서 로마는 서로 갈라졌지만 로마 교황이 동로마에 세금을 내고 간섭도 받는 그런 처지였다.
하지만 성상 숭배 금지령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세상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포교하려면 구체적으로 보여줄 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로 두 로마는 완전히 남남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 후에 동로마는 레어 5세 때 또 한 차례의 성상 숭배 금지령이 내려졌다가 이 금지령이 점차 지지를 잃어서 결국엔 성상 숭배를 허용한다.
이제는 미술가들이 마음대로 막 그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까지 허용할 수는 없으니까 어떤 정해진 틀에 맞춰서 그리도록 했다. 그러한 그림을 이콘이라고 한다.
비즈틴 제국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의 관념을 따르도록 했다.
성모의 옷이 그리스의 조각상을 보듯이 주름이 잡혀 있고 약간 딱딱한 느낌이 나게 마치 조각한 것처럼 표현되었다. 얼굴이 그냥 단일색으로 평평하게 친해진 게 아니라 명함도 있고 나름대로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그리스 헬레니즘 시기의 특징이 얼굴에 입체감이 있고 그리고 조각상에 새겨진 주름 같은 것이다
성모의 무릎 부분이 빛의 반사가 일어나도록 금빛으로 표현하거나 빨간색 의복이라든지 보라색 혹은 진홍색 같이 황족의 색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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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기독교  미술

        - 초기 기독교 미술의 역사와 특징

서양 미술사에 등장하는 첫 번째 시기는 초기 기독교 미술의 시대로 밀라노 칙령이 발효된 313년에서부터
서 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까지 나타난 미술을 가리킨다. 

4세기 중엽에는 드디어 로마가 그리스도교 미술을 자기들 안에 인정하는 시기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있다면 313년 콘스탄티니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을 우리가 눈여겨볼 수밖에 없다.
313년을 중심으로 그 이전까지 기본적으로 로마는 기독교 세계에 대해서
제국의 종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313년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점차 점차 이 신앙을 중심으로 제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가치를 모두 바꾸게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 시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신화가 있듯이 다양한 신을 섬기는 다신교 시대였다.
유일신 사상인 기독교와는 당연히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다.

로마 시대 기독교인들은 큰 박해를 받고 자신의 신앙을 숨겨야만 했다.
카타콤에 숨어서 눈에 띄지 않게 자신들만의 기독교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이렇게 당시 기독교인들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카타콤에선 암호문들과 함께 종교적 색채의 벽화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런 그림들은 로마 벽화의 양식적인 특징이 보이기도 하지만 주된 내용은 역시 성경의 내용과 구세주 그리스도와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를 통해서 천국을 희망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길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이렇게 박해받던 기독교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부터 상황의 반전을 맞게 된다. 


초기 기독교 미술을 이해하고 어떻게 공인되었는지 살피기 위해서는 콘스탄티노스가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312 10 28일 로마의 밀비우스타리에서는 로마 제국 최고의 자리를 두고 콘산티누스 1세와 막센티우스 사이에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전투를 앞두고 콘산티누스는 꿈에서 환영을 보게 된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더니 십자가를 보여주며 이 표식으로 승리하리라는 말을 전해 준다. 영문을 몰랐던 황제는 방패와 깃발에 십자가 문양을 그려놓고 전투에 참여했다. 십자가를 앞세운 콘살티로서의 군대가 대승리를 거두었고 콘산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이런 신비한 체험을 한 콘산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보장해 주고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이르러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이렇게 지하에서 올라온 기독교인들은 숨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공개된 장소에서 교회를 짓고 모이기 시작한다. 넓은 공간이 필요했고 찾다가 바실리카를 대안으로 삼게 되었다.

바실리카라고 부르는 실내 공공건물이었다.
바실리카는 로마 시대의 공공건물로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열렸고 재판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초기 기독교 건축에서 말하는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들이 바로 이런 교회들이다.
로마네스크 고딕으로 이어지는 이 바실리카 양식은 로마 시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바실리카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길게 늘어진 직사각형, 장방형의 넓은 건물을 말한다.
바실리카를 양식은 넓은 복도와 기둥 이 기둥이 열을 맞추어서 늘어져 있는 것을 열주, 이 열주 옆에는 측랑이 있고, 또 끝 공간에 재단이나 기도실을 설치하기도 했다.
가톨릭에서는 이 바실리카를 교황이 인정한 특별한 성당들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기도 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대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성당은 단 4개밖에 없다고 한다.

바실리카의 형식으로 로마에 처음 지어진 몇 개의 교회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옛 성 베드로 대성당, 살바울로 포리의 무라 산타마리아, 마주어의 산지오바니 인 라테라노가 있다. 물론 이들은 훗날 신축되거나 새로운 양식이 가미되면서 모두 처음 지어졌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 않다. 그중 가장 중요한 교회가 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 정면 나무위키 사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은 르네상스 이후에 재건된 것으로 이것과 구분하기 위해 첫 번째 지어져 훗날 사라진 교회를 옛 성베드로 대성당이라고 부른다
바실리카 형식으로 지어진 옛 성베드로 대성당은 훗날 교회 건축의 발달에 모범을 제시해 주었다. 

 

바슬리카 건축 양식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들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교회의 건축 구조가 바슬리카 양식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첫째 3개 이상의 통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둘째 친랑보다 신랑의 천장이 높아야 한다. 세 번째 중앙 통로인 신랑 상단 벽면에 채광창이 열 지어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을 때 바슬리카 양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바세리카 형식을 모범으로 서양 미술사의 교회 건축 양식은 지속적으로 진화해 갔다.
대성당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중세 고딕의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 건축도 바실리카 형식을 기본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 미술의 가장 중요한 미술사적 의의는 고대 로마의 바실리카로 교회 건축의 모범이 될 형태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건축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특히 기독교 미술이 지배적인 중세 미술은 교회 건축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교회를 장식하기 위해 회화와 조각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비엔나 창세기의 일부


초기 기독교 미술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이 바실리카뿐만이 아니다.
성경 필사본  역시 초기 기독교 미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성경이기 때문에 아주 당연히 정성스럽게 손으로 옮겼다. 이러한 필사본에는 정성스럽게 그린 세밀화들이 남아 있다.
또 이러한 필사본은 양피지에 남겨져 있었는데 송아지나 양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아주 고급 재료로 더 세밀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남겨진 세밀화들은 기독교적인 의미의 도상(이콘)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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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기독교 미술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 관용령이 공포되기까지의 300년간 걸린 기독교는 기원 1세기 초에 생겨서 역대 황제에게 계속 박해를 받았다. 로마의 국민들은 불안이 높아져 제정 말기에 가까워짐에 따라 퇴폐적 경향과 국정의 불안으로 정신적 구제를 찾는 기독교인들은 많이 늘어갔다.

기독교의 전신인 유대교가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신학자 사이에도 그의 옳고 그름을 둘러싼 논쟁이 있어 종교미술로서의 발생이 저지되었고 황제의 박해로 인해 공공연한 활동을 할 수 없었기에 1세기에서 시작되어, 5세기경 동방에서 비잔틴 미술, 서방에서는 메로빙거 왕조 미술의 시대가 출현하기까지, 주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미술을 초기 기독교 미술이라고 부른다.

 

 

 

2. 비잔틴 미술

 

비잔틴 미술은 동로마 제국의 예술품으로 4세기 경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에 이르는 시대에 나온 미술품을 말한다.

로마 제국 전역에 퍼져 있던 기독교는 게르만 여러  민족 사이에도 깊이 침투되어 있다. 로마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4세기경부터 게르만의 여러 민족이 각지에 침입하여 새로운 지배자로서 머무르게 되었다. 고대제국의 붕괴로부터 소위 로마네스크 미술이 생겨났던 10세기경까지의 사이를 넓은 의미의 중세초기라고 부르고 있다. 전기에는 강력한 통일국가도 없으며, 토지개발도 충분히 진척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지역차가 컸다. 비잔틴제국의 교회 내에지배자도 57세기에 걸쳐 점차 기독교(가톨릭)로 개종하고, 프랑크 제국을 중심으로 서구적 기독교 미술이 형성되는 길이 열렸다.  근년에는 8세기 중엽을 경계로 하여 전기를 메로빙거 왕조 시대, 후기를 카롤링거 왕조시대로 구분하여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3. 카타콤베의 미술

 

로마 주변 특히 아피아 가도를 따라 만들어진 상 칼리투스, 도미틸라, 프레테스에 있는 것이나 로마 시내의 상 아그네제, 프리실라에 있는 것이 유명하나, 나폴리, 시라쿠사, 알렉산드리아 등 로마 이외의 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로마 시내에는 신자인 귀족의 사저 지하실에 제실이 만들어져 있는 것도 적지 않았다. 박해를 피해서 숨은 사람들은 지하묘실에 제실이나 예배실을 만들어 매일매일의 신앙생활을 지켜 나갔다.

이 지하 제실을 카타콤베라고 부른다.  

자기들의 예배 장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가장 소박한 이유에서 생겨난 초기의 장식은 식물이나 신화의 세계를 묘사한 세속적인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점차 이러한 주제에 신앙적인 의미가 부여되자 단순한 장식도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초기의 것은 폼페이의 벽화 등과도 공통점이 많은 헬레니즘 미술의 기술을 이용한 것이었다. 주제는 신이나 복음서의 내용 자체가 아니고 허다한 상징을 통한 표현이 행하여졌다. 카타콤베 내부는 지하에 여러 층을 이루면서 종횡으로 뚫린 갱도를 파서 주위 벽면 곳곳에 사자를 모시는 감실을 배치하고, 여기저기 광장을 만들어 이곳을 그들이 예배 장소로 사용하였다. 벽이나 천장은 벽화나 부조를 이용하여 장식하고 있다. 지하 제실의 장식은 에트루리아 시대의 옛날부터 있었던 습관이다. 카타콤베의 장식 양식은 시대적으로도 변천을 겪었다. 목자, 포도 무늬, 어린 양 등은 성서에서 유래된 것과 전원 풍경과 로마 신화에서 취재된 낙원의 그림 등이 주된 표현은 헬레니즘 미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이 외에 공작, 성령이나 죽은 자의 영을 천상으로 옮기는 사자로서의 비둘기, 부활을 의미하는 불사조 등이 기독교적 상징으로 자연주의적 표현에 의해 취급되었다

 

 

4. 바실리카식 교회당

 

산비탈레 성당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운 성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라테라노의 성 조반니, 성 파울로 폴리 레 무라,  마리아 마지오레 사원, 성 사비나 사원, 성 클레멘테 사원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는 바실리카식 교회당이다.

전자는 제실 이외에 보다 큰 공간이 필요하였다. 초기 기독교가 채택한 교회 건축의 한 양식은 바실리카식이었다. 고대사에 거래소·재판소 등,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공공건물 형식과 유사하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기독교 교회와 고전시대의 종교적 신전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은 후자가 단순히 신이 거처하는 집인 데 대해, 전자는 신의 주거인 동시에 신도가 그곳에 모여 예배상의 의식이나 집회를 행하는 장소였던 점에 있었다. 따라서 . 바실리카식 회당의 기원은 근년에는 교도 박해가 적었던 오리엔트 지방에 있던 교회 건축과,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방의 민가 양식이 구 바실리카에 상호 영향을 준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기둥은 네이브의 주벽을 받치기 위해 창과 평행으로 세워졌으나 아치 구조가 발전됨에 따라 기둥 사이는 넓어진다. 지붕은 처음에는 목조의 박공 형태였으나 후에 석조의 아치 구조로 발전하였다. 애프스의 돌로 된 지붕 내부 및 제실과 네이브를 구분하는 아치형 부분에는 모자이크 장식이 되어 있다.

제단 앞에는 승려가 의식을 행하기 위한 장소인 비머가 네이브와 직각으로 폭넓게 교차되어 있다. 비머는 후세, 특히 중세의 트랜세프트(좌우에 붙은 낭하)로 발전하여, 자형 플랜을 구성한다. 후기에는 비머 앞에 성가대석이 놓인다.  

 

5. 집중양식

 

로마의 성 콘스탄차는 묘실로부터 개축한 집중식의 좋은 예인 집중양식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또 다른 건축 방식으로 집중식이 있다. 로마 시대의 묘당·욕당·신전 등으로부터 발달하여, 주로 세례당의 건축양식으로 쓰였다. 오래된 것은 다 소실되었으나 이것이 비잔틴 미술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기둥의 열을 원형으로 배치하고 둥근 지붕을 씌우는 원당 또는 팔각당 형식이다. 아르메니아나 소아시아는 일찍부터 기독교국이 되었고 또 돔 형식이 발전된 곳으로써 독특한 돔 건축이 있었던 것 같다

 

6. 모자이크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폼페이나 엘코라노를 거쳐 발달된 모자이크화는 힘찬 선과 호화로움을 표현하는 점에, 새로이 세력을 넓혀가는 기독교 미술의 정신과 동방적인 취향에 적합한 바가 있었다.

5세기 초의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사원 서쪽에 신·구약 성서가 벽면에 도해되어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국가 보호하에 적극적인 태도로써 새로운 권위로 등장해 간다는 사실의 표현인데, 표현 방법은 오히려 종래의 자연적 형체를 추구하는 사실적 방법을 벗어나 인상적·추상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형체의 간결과 강조를 통하여 교의 설명을 용이한 것으로 하는 동시에, 기독교 신앙의 모체가 된 동방의 전통이기도 하였다.

이들 교회 건축은 이탈리아의 강한 일광을 피하여 두꺼운 벽으로 덮여 있으나, 이러한 큰 벽면을 메우는 데 가장 많이 쓰인 것은 모자이크였다.  초기의 작품에는 아직 카타콤베와 공통되는 헬레니즘적 목가적, 또는 장식적인 소박한 상징성을 나타내는 것이 있었으나, 4세기말의 산타 푸덴치아나에는 12 사도에 둘러싸인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거리와 골고다 언덕에 서 있는 십자가를 눈앞에 그리는 장면이 있다

 

7. 공예

 

기독교적 의미를 갖는 상징적인 도상이 그려진 유리 제기 등에 볼 만한 것이 있을 뿐이다.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조각은 거의 그 중요성이 인정되지 못하고, 주요한 것으로는 고작 <선한 목자>란 대리석상이 알려져 있다. 또한 공예에도 뛰어난 것은 드물고, 대개 로마 시대의 것을 계승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밖에 소아시아산이라고 생각되는 상아나 금공의 제기류4세기 이후 조금씩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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