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시대 미술

        - 바로크 시대 미술의 특징

바로크 시대와 바로크 스타일은 17세기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발전한 예술 양식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크 시대 미술의 시대적 배경

17세기 유럽의 사회·문화적 환경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고 청교도 혁명과 계몽주의 등의 영향으로 르네상스 시대와는 다른 양식 발전했습니다.

시대적 범위는 16세기말부터 18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발전한 예술 양식입니다.

사회·문화적 배경

종교적 영향: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 증대, 종교 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는 예술 작품 증가

정치적 변화: 절대왕정의 발달, 귀족 계급의 후원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예술 작품 제작

철학적 사조: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에서 벗어나 더욱 감성적이고 역동적인 표현 추구,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이성과 감성의 조화 모색

 

 

❤️ 바로크 시대 미술의 예술적 특징

1. 극적인 표현

  • 강렬한 대비와 역동적인 구도를 통해 극적인 효과 추구
  • 감정의 표현을 중시하며 관객의 감성에 호소

2. 화려함과 장식성

  • 풍부한 색채와 복잡한 장식을 사용
  • 웅장하고 화려한 분위기 연출

 

 

 

카라바조의  " 성 마태오의 소명 "

3. 빛과 그림자의 대비

  • 키아로스쿠로(명암대비) 기법을 통해 깊이감과 입체감 강조
  • 빛을 통한 극적인 효과 창출

*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는 이탈리아어로 '밝음'(chiaro)과 '어두움'(oscuro)을 의미하는 단어의 조합으로, 미술에서 빛과 그림자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법,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소명", 렘브란트의 "야경"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성 요셉의 꿈",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등

 

4. 역동성과 운동감

  • 인물이나 사물의 동적인 포즈와 구도를 통해 생동감 표현
  • 곡선의 사용으로 유동적이고 활기찬 느낌 전달

5. 종교적 주제의 강조

  • 가톨릭 교회의 영향으로 종교적 주제의 작품이 많이 제작됨
  • 성인들의 삶과 순교를 극적으로 묘사

 

바로크 시대의 예술은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변화를 반영하며 감성적이고 역동적인 표현을 통해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회화, 조각, 건축, 음악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나타났으며, 오늘날까지도 바로크 예술의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 바로크 시대 미술의 대표적인 화가와 작품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인 렘브란트와 베르메르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인 렘브란트와 베르메르의 작품은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이 두 화가의 대표작과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렘브란트 반 레인

 

" 야경 "(The Night Watch) 은 렘브란트

대표작: "야경"

"야경"(The Night Watch)은 렘브란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그림의 정식 제목은 "프란스 바닝 코크 대위의 민병대 출정"입니다.

크기: 363 x 437 cm의 대형 그룹 초상화

제작 연도: 1642

특징:

극적인 명암대비(키아로스쿠로)를 사용하여 인물들의 움직임과 긴장감을 강조

중앙의 밝은 부분과 주변의 어두운 부분의 대비가 뚜렷함

인물들의 동적인 포즈와 표정을 통해 생동감 있는 장면 연출

복잡한 구도와 다양한 인물 배치로 깊이감과 입체감 표현

 

대표작: "자화상" 시리즈

렘브란트는 생애 동안 약 100점의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이 시리즈는 그의 예술적 성장과 개인적 성찰을 보여줍니다.

특징:

다양한 표정과 포즈를 통해 자신의 내면 탐구

나이가 들어감에 따른 얼굴의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통해 감정의 깊이 표현

두꺼운 물감 사용으로 질감과 입체감 강조

 

렘브란트의 주요 기법:

키아로스쿠로(명암대비): 극적인 빛과 그림자의 대비로 분위기 조성

임파스토(impasto): 두껍게 물감을 바르는 기법으로 질감 표현

심리적 표현: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표현

 

 

 

요하네스 베르메르

대표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베르메르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북구의 모나리자"라고도 불립니다.

크기: 44.5 x 39 cm의 소형 초상화

제작 연도: 1665

특징:

  • 소녀의 신비로운 표정과 시선이 관객을 끌어들임
  • 푸른 터번과 진주 귀걸이의 대비가 인상적
  • 부드러운 빛의 처리로 소녀의 얼굴과 진주의 광택을 섬세하게 표현
  •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구도로 소녀에게 시선 집중

 

 

대표작: "우유를 따르는 여인"

일상적인 장면을 아름답게 포착한 베르메르의 대표작입니다.

제작 연도: 1658

특징:

  • 창문에서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이 장면을 밝게 비춤
  • 우유를 따르는 여인의 동작을 정교하게 포착
  • 정물화적 요소와 인물화의 조화
  • 제한된 색채 사용으로 차분하고 조화로운 분위기 연출
  • 베르메르의 주요 기법:
  • 카메라 옵스큐라 사용 추정: 정확한 원근법과 빛의 표현
  • 점묘법: 미세한 점들로 색채와 질감 표현
  • 제한된 팔레트: 주로 청색, 황색, 적색 계열의 색상 사용

베르메르는 델프트라는 작은 네덜란드 도시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작품은 이 도시의 일상적인 모습을 아름답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 두 화가의 작품을 비교하면, 렘브란트는 극적이고 역동적인 표현을, 베르메르는 고요하고 섬세한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는 데 주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화가 모두 빛의 사용에 탁월했지만, 그 접근 방식은 매우 달랐습니다. 이러한 차이점과 각자의 독특한 기법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크 미술을 공부하는 데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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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코코 시대 미술

        - 로코코의 개념

프랑스어 rocaille(조개무늬 장식)이라는 말에서 시작된 로코코(Rococo)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형식이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를 꾸몄던 바로크 양식이 수정, 약화된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으로 왕실 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주아의 예술이다. 베르사의 궁전은 건축적으로도 그렇고 조각 회학 음악 문학 이것들이 모두가 이루어지는 문화 중심 센터 역할을 했다. 절대 왕정을 위한 문화예술센터인 베르사유를 꾸미기 위한 모든 예술 정책이 프랑스에서는 바로크라고 볼 수가 있다. 궁전을 꾸밀 때에 이 사치스럽고 화려한 조개 장식을 뜻하는 건데 로코 거를 떠올렸을 때 장식적인 이미지가 떠오른 것이다. 18세기에 바로크에 영향을 받은 기술이 로코코니까 후기 바로크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17세기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루이 14세 사후, 남성스럽고 조금 엄숙한 절대 왕정 그 힘을 과시하기 위한 화려한 스타일이었다면 이것 건은 조금 부드럽고 서정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좀 경박하다는 특징도 있다.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 루이 14세 시대의 역사적 사건

그 당시 프랑스는 왕의 권력을 한껏 치켜 세운 그림을 보면 시대상을 알 수 있다.
풍성한 머리숱을 가지고 있고 황금 칼을 차고 지팡이를 짚으면서 위엄 있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눈부분을 확장시켜 보면 빛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 왕을 볼 때는 보는 사람들은 올려다 봐야 한다.
이 태양왕 루이 14세의 치세의 성격을 아주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베르사유의 궁전을 건설해서 모든 국가의 기능을 집약시켰다.

모든 귀족들을 에티켓이라는 궁정 규칙으로 묶어두고 태양왕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세상이 돌아가도록 만들어 놓았다.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이 절대 왕이 거하는 베르사유 궁전에서라야 귀족 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시대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루이 14세는 사치와 향락의 극치를 누리고 살았다. 그가 죽자 당대의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은 이제 더 이상 베르사의 궁전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의 영지로 돌아가서 베르사이유가 가지고 있는 그 화려함의 극치를 자신들의 성에 구현시키고 싶어 했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어졌다. 바로 루이 14세가 죽고 귀족들의 시대가 도달하게 된 것이다.

 

 

❤️ 로코코 시대 미술의 대표적인 화가

        - 장앙투안 바토 로코코의 선구자 

대표적인 화가로 장앙투안 바토(16841010~ 1721718) 발랑시엔 태생으로 처음에는 지방 화가로 활동했지만 18세 때 파리로 가서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아, 본격적으로 그림을 공부하였다. 무대 미술가에게서 미술을 배우게 되었다.
아깝게 2등으로 당선되었지만 이제까지 없던 유형의 그림으로 인정을 받아서 로코코 미술의 창시자다 이렇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늘 병약했다. 3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그는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대표작으로 제르생의 상점 간판이라는 작품인데 갤러리에서 귀족들이 그림을 옮기는 걸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로코코적인 성향을 좀 보여주는 재밌는 그림인데 하인들이 집어넣고 있는 그림이다. 제르생이 누구냐 하면 와토의 친구이자 미술품 상인이었다. 이 작품은 화랑 입구에 장식한 작품으로 그려진 것이다. 그림의 중앙에 보면 와토의 자화상으로 보이는 젊은 신사가 정중히 숙녀를 화랑 안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초대받은 그녀가 힐끗 왼쪽을 바라보고 있다. 거기에는 루이 14세의 그림이 상자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화랑의 주인인 제르생이 귀족 또는 부르저로 보이는 손님에게 둥그런 한 점 그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이 귀족을 보면 돋보기를 보면서 아주 흥미롭게 관찰을 하고 있다.

 

 

키테라 섬으로의 순례

키테라 섬으로의 순례라고 하는 작품이다.
와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키테라 섬은 고대 그리스의 한 섬으로서 사랑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섬 사랑의 섬으로써 사랑하는 여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상상 속의 섬 이상적인 섬이다.
오른쪽에 보면 비너스가 보인다.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이 이 그림을 보고 그 당시의 분류법으로는 잘 분류가 되지 않는 새로운 장르의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이 이 작품에다가 새로운 장르의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페트 갈랑트이다.
이 양식이 로코코의 전형적인 양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페트 갈랑트의 뜻은 전원의 축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세련되게 차려 입은 남녀들이 활짝 트인 야외에서 춤추고 담소하고 유희하는 모습을 주로 담고 있는 그림이다. 멀리 키데라 섬이 흐릿하게 보이는 것 같고 안개 낀 듯한 파스텔톤의 바다 위로 돛이 보이고 그 주변에 포동포동하게 가려진 큐피드들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몽환 쪽으로 보인다.
그림을 살펴보면 많은 쌍의 남녀들이 보인다. 남자들은 한결같이 세련된 멤버로 여성들에게 매력 있고 정중하게 대하고 있어서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우아함과 사랑스러움이 듬뿍 담겨 있다.
로코코 후대에 갈수록 사실 이와 같은 남녀의 그림에 약간의 유머와 풍자를 담아서 남녀의 삐뚤어진 욕망과 탐욕을 그렸을 것인데 이 작품은 한없이 아름답기만 하다.
이와 같이 판타지적인 이상향을 꿈꾸는 듯한 이 그림은 늘 병약했기 때문에 마치 자신은 이런 현실을
멀리서 바라만 봐야 한다는 슬픔 적인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와토는 이와 같이 페트 갈라트 즉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한 선남선녀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을 담은 그림을 많이 그렸다.

로코코 스타일이 목가적인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서 향락적인 그런 그림을 추구하는 배경이 있고 신사와 숙녀가 보이는데 이런 제스처 보면 좀 과한 경향이 있다.

로코코는 바로크나 르네상스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조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18세기는 로코코 뿐만 아니라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병존하는 시대이며, 이 시기에 유행하고 나타난 예술양식들은 서로 간에 영향을 받고 주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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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크 시대 미술

        - 바로크 시대 미술의 어원

어원은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로 'pérola barroca'에서 유래된 단어이며 프랑스의 여행가인 샤를 드 브로스의 편지나 생시몽 공작의 회고록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로크는 서양 예술사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이자 예술 사조의 한 유형이기도 한데 뜻은 왜곡된 삼단논법, 혹은 불협화음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소리를 의미한다. 진주와 같은 르네상스를 망쳤다는 의미로 후대 비평가들이 17세기 미술을 비하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이다. 바로크 양식은 군주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지원받은 궁정적인 바로크와 이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에서 발현한 부르주아적 바로크로 나뉘어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작품은 원근법을 강조한 그림이고 왼쪽 바로크 그림은 뭔가 작품의 크기도 그렇고 작품에 등장한 인물 수도 그렇고 과할 정도로 과장된 그림이다.
즉 오른쪽 르네상스가 조화와 균형 위에 중점을 둔 작품이라면 왼쪽 바로크는 과장 감성적이고 극적인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 바고크 시대 미술의 대표적인 화가

        - 최초의 바로크 미술가 카라바조

최초의 바로크 미술가는 카라바조라고 간주되고 있다. 

메두사, 유디트 등 대표작을 그린 카라바조는 다채롭고 화려한 르네상스 회화들과 달리, 어두컴컴한 배경 속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극단적으로 명암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의 개척자로서 그의 회화 기법은 루벤스, 렘브란트 등 후대의 바로크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남겼다. 

그는 깊은 어둠의 배경과 주인공 주변의 환한 빛의 대조를 통해 인물을 강조하고 이렇게 빛을 이용해 그림 안에서 극적 연출을 하였다.  또 역동적 신체 표현이나 사선 구도와 같은 동적인 구도를 통해 그림을 보다 적극적으로 대중들에게 어필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은 아주 생생한 사실적 표현을 가능케 하였다. 그리고.그리고 현실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해 내었다면 바로 그의 사실주의는 현실엔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추한 것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사실주의였다.

 

 

       -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이용한 안니발레 카라치

또 다른 화가인 카라치가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인 라파엘로의 작품을 연구해 당시 매너리즘을 극복하려고 하였고 그 방법을 찾아냈다. 아이러니한 것은 매너리즘 작가들이 르네상스 작가들을 뛰어넘기 위한 방법으로 복잡하고 기교적인 그림을 그렸던 반면 카라치는 매너리즘을 극복하기 위해 전성기 르네상스 작가 라파엘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카라치 작품

카라치가 선배인 마테냐의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마테냐 그림과 마찬가지로 카라치 역시 예수의 발바닥을 보여주어 예수의 고난과 희생을 알려주는 것이 이 그림의 목적이다. 이 두 화가가 표현한 방법은 확실히 다르다. 만테냐의 그림을 보면 예수님의 발바닥에 박힌 상처가 하고 경건해지는 느낌이 느껴지는 반면 카라치의 그림을 보면 너무나 적나라하게 피의 표현 모습 부분과 예수 그리스도가 아주 비좁아 보이는 공간에서 자세마저 허리가 틀어져 있어 아주 불편해 보인다. 이는 보는 사람에게 불편한 느낌을 주는 것과 동시에 드라마틱한 느낌을 주었다.

 

 

       -  라스메니냐스 시녀를 그린 벨라스케스

스페인은 바로크 시기 벨라스케스라는 훌륭한 화가를 탄생시켰다.
색감은 베네치아 화풍에서 영향을 받았고 어두운 배경 부분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다.
특이한 것은 표정인데 딱 봐도 좀 성깔 있어 보이는 교황의 모습을 통해 교황이라 해도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와 바로 그의 차이이다. 만약 르네상스 시대 화가가 교황을 그렸다면 분명히 미화해서 그렸겠지만 바로크 시대 화가들은 이렇게 아름답지 않더라도 보이는 대로 인물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 그림을 그렸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약화된 지상의 가치, 인간이 지닌 감정, 상상력 등에 대한 가치를 반종교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였다.

서양 미술사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라스메니냐스 시녀들이다.
마치 스냅 사진을 찍듯 순간 상황 포착이 매우 잘 표현되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물들의 시선으로 그림 안의 인물들이 서로 본다거나 화가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인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에서 공간이나 등장인물들은 모두 실제로 있는 것이지만 이 장면 자체는 온전히 벨라스케스가 만들어낸 것으로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가가 공간과 장면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창조자로서 예술가를 나타낸 것이다. 이 그림을 멀리서 보면 굉장히 자세히 그린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여기 공주의 상체 부분만 확대해서 보면 특히 여기 이렇게 이쪽에 공지의 머리 장식 부분을 보면 대충 붓질 몇 번으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전 작가들처럼 윤곽을 뚜렷하게 그리고 그 안에 색을 채워서 그린 것이 아니라 붓질 몇 번으로 색을 칠해 형태를 표현한 것이다.

 

 

 

       -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루벤스의 그림

네덜란드 화가 중 루벤스이다. 사실 루벤스는 독일 출생이나 당시는 국가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이었고 루벤스 자체가 워낙 네덜란드를 사랑했기에 되게 네덜란드 화가로 본다.
루벤스는 이후 살펴볼 렘브란트에 비해 죽을 때까지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편히 살다 간 화가이다.

루벤스는 신교도가 많은 네덜란드에 있었지만 반 종교개혁주의자였다.
반 종교 개혁은 종교 개혁으로 세력을 잃은 카톨릭이 잃어버린 세력을 회복하기 위한 자성의 목소리로 일으킨 가톨릭 교회 안에서의 운동이다.
이런 반 종교 개혁자였던 루벤스는 다른 네덜란드 화가들에 비해 성화를 많이 남겼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그의 성화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일본 후지티비 애니메이션 플란다스의 개로 우리에게 친숙할 수도 있는데요.
사실 이 애니메이션은 19세기 영국 소설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화가를 꿈꾸는 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그의 평생소원은 루벤스의 그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에만 공개된다는 루벤스의 그림을 보러 성당으로 가지만 너무 어두워서 결국 그림을 보지 못하고 네로의 애견 파트라슈와 추위에 견디지 못해 죽고 만다는 슬픈 이야기로 여기 나오는 루벤스의 그림이 바로 이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이다.

 

 

       -  렘브란트의 역동적인 그림

카톨릭 성향의 루벤스와 달리 렘브란트는 개신교였고 이 영향으로 그의 작품 중 성화의 비중은 그렇게 높지 않다.
성화를 그리는 것이 성스러운 행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개신교에서 렘브란트가 주로 그렸던 것은 초상화로 특히 자화상의 경우 100편이 넘는다.
이 당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대표급 화가가 된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시를 지켰던 민병대 초상화를 의뢰받아 작품을 완성했는데 모두 똑같이 목숨을 걸고 암스테르담시를 지키는데 누구는 빛을 잔뜩 받아 주인공처럼 표현된 반면 누구는 어두컴컴한 배경에 묻혀 있어 등장인물들의 비중이 너무나 극명하게 갈렸기 때문에 이 초상화를 주문했던 민병대 단체는 불평했고 엄청난 욕을 먹었다.
오늘날 이 작품은 서양 미술사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히지만 당시엔 잘 나가는 렘브란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작품이 된다.
그러나 미술사적으로 이 그림을 보면 바르코 스타일의 극적인 연출과 역동적 장면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이 작품에 표현된 빛과 어둠의 사용은 오늘날 렘브란트의 조명 효과를 통해 주제가 한눈에 들어오고 감상자인 나도 그 속에 있는 듯한 사건에 동참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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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의 조각

        - 피에타와 다비드상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내 오른쪽에 전시되어 있고 2m에 달하는 높이와는 달리 옆면의 두께는 1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옷자락 주름의 입체감 때문에 깊이 있는 공간감이 효과적으로 나타난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의 아름다움과 예수의 죽음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메디치가가 또 물러가고 사브나롤라라는 독재자가 한동안 통치 한 후에 새로운 공화정이 성립을 했다.
그래서 새로운 공화정의 정신을 기르기 위해서 시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공화정의 상징인 궁 앞 광장에 이 다비드상을 세웠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거장의 반열에 오른 미켈란젤로는 1501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로부터 성당의 북쪽 익랑 위에 있는 부벽에 올려놓을 다윗을 조각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돌팔매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을 통해 압제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쟁취한 피렌체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담긴 작품이었다. 그는 조각의 재료로 적당하지 않다고 두 명의 조각가로부터 작업이 수십 년째 중단되어 버려진 5.5m짜리 거대한 대리석이었다.

그런데 26살의 미켈란젤로가 약 3년 동안의 기간을 거쳐서 다비디 상을 만들어냈다.
5m짜리의 거대한 조각은 10대 미소년의 모습으로 표현한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상과 달리 청년 다윗으로 조각을 했다.

그런데 6톤에 이르는 조각상을 성당의 높은 곳에 올리기가 쉽지 않았고 장엄한 걸작을 성당 부벽 같은 곳에 갖다 둘 수 없다고 판단한 오페라 델 두오모는 다비드 상이 새롭게 놓일 장소를 정하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산드로 보티첼리를 포함한 피렌체 시민 30인의 위원회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토의 결과 이 조각상을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피렌체 시청 베키오 궁전 앞에 놓기로 결정했다.
미켈란젤로의 삶중에서 가장 자유롭고 자신의 명성과 존중을 받으면서 산 유일한 시기라고 한다.

        - 고난의 시스타나 천장화

교황권의 확립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율리우스 2세 교황은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무력으로 정복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강성 교황이었다.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대형 건축과 예술에 돈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이 소위 16세기 초 로마의 르네상스의 계기가 되었다.

건축가 라만테를 불러서 성 베드로 성당을 짓게 하고 조각가 미켈란젤로, 천재 화가 라파엘로를 불렀다.
미켈란젤로에게는 율리우스 2세가 자신의 영묘 자신의 무덤의 조각을 맡겼는데 가장 좋은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서 미켈란젤로는 약 100km 떨어진 곳에 직접 가서 우마차로 항구까지 옮겨서 그리고 배에다 그걸 싣고 로마까지 그 대리석을 운반을 8개월 동안을 이 고된 작업을 했다.
그런데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가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 나서 피렌치로 돌아가버린 미켈란젤로는 볼로냐에 마지못해 다시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교황 앞에 사죄를 했었다.
교황은 조각가인 그에게 그림을 그리라는 명령을 했고 그는 여러 차례 도저히 자신을 못하겠다고 교황에게 말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할 수 없이 그는 시스티나 성당에 천장에 매달려서 고된 작업을 무려 4년 동안이나 해야 했고 그 4년 동안의 모진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서 미켈란젤로는 성당의 천장을 다 덮은 이 거대한 회화를 경이적인 속도로 마쳤다. 보통 화가들은 그 10분의 1의 크기인 벽화도 3년 동안 그렸지만 그는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을 4년이 걸린 것이다.

회화라는 장르 자체를 싫어하는 데다가 하필 천장화. 조금만 잘못 하면 회반죽이 얼굴로 떨어지기 일쑤고, 이런 과정으로 이런 천장화을 그려내려면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야 하기에 극단적인 심리적인 고통 속에서 이와 같은 대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천장 벽화는 사방에 구약의 선지자들의 그림을 그려놓고 그 가운데 천지 창조 장면을 그려놓았다.
그 핵심에 바로 신이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는 장면을 그려놓은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탄생하는 장면을 묘사를 하고 있는데 르네상스적인 휴머니즘을 이 작품 속에서도 표현하고 있었다.

 

        - 최후의 심판

클레멘스 7세는 계약서에 서명을 한 직후 하느님의 곁으로 돌아갔으며, 그 다음 교황인 바오로 3세 때에 작품이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바오로 3세는  '교황청의 최고 건축가, 화가, 조각가'로 임명하는 포고령을 반포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중앙의 예수부터가 성화에 그려지는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다 못한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그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종말 속에서 간신히 건져 올려지는 의로운 성도들이, 좌측에는 예수에게 가차없이 쫓겨나는 가짜 의인들이 그려져있다. 게다가 우하단을 보면 그렇게 내쫓긴 거짓 증인들을 악마들이 가차 없이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으며 심판을 선포하는 천사들도 이들을 혐오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실오라기도 없는 말 그대로 나체 상태였다.

1564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로마 전례를 재정립한 후 로마 전례 상 나체화를 허용하지 않기로 한 것에 따라, '비속한 부분은 모두 가려져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져 대대적인 검열 작업을 받게 되었으며,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그림의 인물에 옷을 그려 가리도록 해서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어려운 시기마다 권력자들이 자신에게 허망한 약속을 했고 또 자신이 오직 노력을 한 그 모든 것들이 좌절되는 순간순간들마다 그런 일어나서 오히려 그때마다 대작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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