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소포타미아 문명 속에 나타난 미술 역사

        - 메소포타미아 시대에 나타난 미술 작품들의 특징

서남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생겨났던 옛 나라들의 미술을 메소포타미아 미술이라 부른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 끼어 있는 비옥한 충적 층대(沖積層)를 그리스어로 '강의 사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인류 문화 3대 발생지로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불리고 있다. 그중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5000년에는 원시농경생활이 강의 상류 지역에서 영위되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미술 특징은 조각 작품이 적고 공예 감각과 기술이 뛰어났으며 그림을 프레스코 벽화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plaque with an image of ritual 의식 숭배의 이미지가 있는 명판

 

        -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미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 태어난 지역으로 비옥한 토양 덕분에 농경이 발달하였고, 북메소포타미아에는 B.C. 6000년경부터 원시 농촌이 형성됐다. 그 농촌은 소집락을 형성하며 벽돌로 만들어서 집을 짓고, 보리를 경작하고 가축을 사육하였으며, 직선적인 기하학 무늬의 채문토기를 창조했다.

사마라 기(B.C. 5100~B.C. 4500), 할라프 기(B.C. 4500~B.C. 4200)에는 그릇 모양이 다양화되어 독특한 광택을 가진 화려한 채문토기가 제작됐다. 이 무렵부터 남메소포타미아에도 원시 농촌이 만들어지면서 에리두 기에 접어들면서 신전이 만들어지고 우바이드 기(B.C. 4000~B.C. 3500)에는 관개농경(灌漑農耕)이 행해졌다. 우루크 기(B.C. 3500~B.C. 3200)에 원시 농촌은 읍으로 확장 발달되고 토기의 제작에는 녹로가 사용되었으며, 대량생산이 가능해져 용도에 따라 기형에도 변화가 생겨(주구(注口) 토기,(주구(注口)토기 쌍구토기쌍구 토기, 대부토기[台付土器] 등) 문양이 없어지고 실용적으로 되었고 그림 문자도 발명되었다.

 

❤️ 메소포타미아 시대 미술의 의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초를 세운 최초의 사람들은 수메르인이었다. 그들은 기원전 3500년경부터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합류하는 지역에 수많은 도시를 건설하고 인류 최초로 문자를 사용했으며 공통의 종교, 수학, 법률 그리고 건축법을 발달시켰다

수메르인들은 왕이 죽으면 저승에서도 사람들을 거느릴 수 있도록 모든 가족과 노예들은 물론 왕궁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함께 묻었기 때문에 부장품을 통해서 그들의 찬란했던 문명을 추측해 볼 수 있다.

 

❤️ 메소포타미아 시대 조각의 대표적인 작품

        -각 나라 별의 조각  유품의 특징:

1. 수메르인의 조소 유품(遺品)은 적다. 남메소포타미아에는 석재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석조(石彫)는 제작되지 않고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그들의 조형 의욕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고 그 기술 습득과 연마할 기회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카파제··아스말·아슈르 등지에서 발굴된 조상(彫像)은 양손을 명치 부분에다 댄 직립상(直立像)으로 상감(象嵌)을 한 이상하게 큰 눈, 곱슬곱슬하고 긴 구레나룻을 단 것이 특색이다. 청동제의 우수한 작품 <<마니스 투수왕 입상(立像)>, <구데아 좌상(坐像)> 등 조소에 대한 관조와 조형 기법의 각 단계마다 진보한 작품을 계속 만들었다

2. B.C. 2000년경 왕위에 오른 함무라비가 만든 함무라비 법전의 정상부의 태양신 샤마슈와, 함무라비의 부조상으로 수사에서 출토된 함무라비 왕의 머리 부분 등은 구데아 모자를 쓴 채 표현되어 인간의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한 왕의 조형은 뛰어난 것이다. 특히 함무라비왕 두부라고 전해지는 작품은 위엄과 풍격이 넘쳐 셈족풍()의 구레나룻과 표정에 노쇠한 그늘을 보여 날카로운 개성 묘사가 매력 있다.

 

3. 앗시리아 미술은 부조로 실내의 요벽(腰壁)을 장식했고 바빌론에서는 대로의 양측과 문·성벽을 이용하여 로제트 무늬의 띠와 사자·황소, 마르두크 신의 성수(聖獸)인 드래건(恐龍) 등을 부조로 표현하고 있다. 황색 신체에 적색의 갈기, 백색의 육신에 황색의 갈기라는 식으로 배색한 사자와 드래건과 짙은 벽청색(碧靑色)의 벽면에 제법 사실적(寫實的)인 조형 감각으로 걸어가는 동물을 표현하고 있다.

 

4. 앗시리아 미술에서 최고는 조소이라고 할 수 있다. 님루드에서 출토된 석회암으로 만든 <아슈르 나시르 팔 2세 상>은 드문 앗시리아 환조의 상으로는 완벽한 유품인데 미숙한 표현이 있지만 앗시리아인으로서 왕자라면 가져야 할 이상적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고, 당시 왕자의 의장 풍속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고 또 명문(銘文)을 흉부에 새겼기 때문에 역사적인 자료의 가치도 많은 작품이다. 이러한 환조의 상과 더불어 부조한 유품은 우수한 기술로 세련된 조형 감각과 관조가 투철한 사실적(寫實的) 능력을 가지고 뛰어난 작품을 많이 만들어냈다.

하나만 놓인 환조 상은 적지만 건축 내부의 요벽(腰壁)에 부조한 장식을 가득 메운 것이라든지 외문(外門)이나 내정 입구에 놓인 유익인면사자상(有翼人面獅子像)의 수호신 등 뛰어난 유품이 많다

아나톨리아 고원이나 시리아 뿐 아니라 앗시리아에서도 입구에 사자상을 배치하는 전통은 오래되었다.다. 건물 문 입구의 수호신의 표현 형식은 히타이트에서 시리아를 통해 영향을 받은 것이라 짐작된다.

히타이트 미술을 훨씬 능가하여 현저한 간격을 보여 주고 있는 앗시리아 유익인면수신(有翼人面獸身)의 수호신상은 조형 감각과 표현 형식의 고도한 예술성을 보여 주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장식풍인 말린 머리카락과 구레나룻 와 인면(人面)에 깊이 팬 눈과 코, 그리고 왕관과 날개가 날카롭고 명쾌하게 파내어서 의장화(意匠化)한(意匠化) 조형과 어울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유익인면사자상은 두르 샤르루킨 궁정 입구에서도 발견됐으나 이것은 더욱 발전하여 조형 표현의 기교와 관조가 진전, 세부까지의 의장화나 추상성이 높아져서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Ishtar gate from Baby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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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이집트 시대의 예술 세계 

       - 고대 이집트 시대 미술의 전반적인 특징

이집트의 미술품이라 할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은 단순한 미술품이 아니다.

신전은 이집트 신들의 신전(神殿)은 '신의 영원한 집'이며, 회화는 현실 세계를 재현하는 수단이며, 조각은 신이나 인간의 영혼이 깃들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대 이집트의 미술은 목적 자체가 실효적이라 할 수 있다. 이집트의 미술품은 제작자의 이름이 표시되지 않았고 일정한 규칙이 있는 이유는 바로 신을 표현한다는 까닭이다.

 

지리적인 요소가 이집트 미술의 특성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막과 바다로 보호되어 거의 2000년간 외국이나 타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고 나일강은 유리한 농업 조건을 제공하여 미술과 공예가 발달할 수 있는 안정된 생활환경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막에서는 예술 활동의 재료가 되는 광물과 좋은 석재를 잘 구할 수 있었지만 목재가 부족하여 레바논, 소말리아, 열대 아프리카 등지로 원정을 다녀야 했다. 아런 원정은 힘든 과정이었지만 결국 이집트의 문명을 풍부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 미술은 이집트 문화의 종교적 신앙을 반영하여 지상의 삶은 내세의 영생에 비하면 잠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고에서 출발했다. 신분과 계급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내세에 자신들이 지니고 갈 유용한 장식물들을 수집했으며 매장과 장례에 최대의 관심을 쏟았다.

 

 

고대 이집트의 미술 활동에서 미술 제작에 종사하는 자는 모두 국왕의 보호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예술활동의 역사는 이집트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 특징이 있다.

 

        - 고대 이집트 시대의 시대별 미술 특징

1. 선왕조시대-기원전 2925년까지 이집트 제1왕조가 성립하기 이전 시기로 그리는 기술과 회화기법은 상() 이집트 암벽화에 나오는 동물화라든가 배 타는 장면, 사냥 장면과 아울러 더욱 세련된 히에라콤폴리스의 무덤벽화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도기는 이 시기의 특유한 산물로서 세련된 기법과 대담한 장식을 하였고 석재를 이용한 작업은 선왕조 시대 후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조각은 작은 동물상이나 원래 눈 화장 용구로 쓰였던 석판 팔레트의 부조장식 따위에서 출발했다.

 

2. 왕조시대-이집트 문화의 다양한 흐름이 모여 단일문화를 이룬 기원전 3100년경 상()이집트와 하() 이집트가 통합된 시기이다.

 

 

 

나르메르왕의  팔레트

기원전 2925~2575년경 초기 왕조 시대의 가장 유명한 미술품은 ‘나르메르왕의 팔레트로서, 왕이 적들을 물리치는 장면을 그려 이집트의 통일을 상징하고 있다. 이 부조는 머리는 옆모습으로 그렸으나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어깨가 정면을 향한 반면 상반신은 절반 정도 옆으로 기울었고 다리는 또다시 옆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개별 장면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파라오를 신성하게 표현한 점에서 오랜 기간 이집트 미술에 나타나는 인물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가장 중요한 인물을 중앙에 배치하고 있고 인물의 크기로 신분의 차이를 표시했다. 기원전 2000년대 말에 아마르나 양식이 등장할 때까지 이런 표현은 계속되었다.

 

3. 고왕국시대-기원전 2575~2130년경 이후로 죽은 자가 거주하는 무덤과 신이 거하는 신전에 석재가 쓰이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의 도시는 대부분 나일강의 범람권이기에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다소 떨어져 있는 신전이나 무덤이 주로 보존되어 있다. 나일강의 진흙을 구워 만든 진흙 벽돌은 선왕조 시대부터 이미 일상적인 건축재료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요새나 신전 경내 및 도시의 성벽, 왕의 거처나 신전 부속건물 등에도 쓰였다.

 

대규모 피라미드를 짓고 그 안에 군주의 시신을 보관하는 방을 두고 주변에는 여러 무덤과 신전으로 이루어진 건물군을 배치한 이집트의 묘소 건축은 대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의 2대왕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알려진 것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파라미드이다. 이 피라미드는 위로 갈수록 작아지는 6층의 계단을 포개 올린 형태이며 내부에는 사각으로 석회석을 붙인 성벽을 둘러 그 안에 왕궁과 같은 모조 건축물을 지어놓았다.

피라미드 건축의 고전적 형태를 보여주는 가자에 있는 유명한 대건축물들 중 146.7m의 제4 왕조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가장 걸작이다.

받침돌을 대어 높이 올린 대열주와 압력을 줄이기 위해 위층에 5개의 빈 방을 올린 화강암 왕실도 특징적이며 왕의 두상과 사자의 몸통으로 조각된 대형 스핑크스는 카프레의 피라미드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피라미드에 사용된 벽돌은 정사각형의 면적이 5.3ha에 달하면서도 각 변의 길이는 30cm 이상의 오차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고 4면의 방향은 동서남북에 정확히 일치한다.

 

4. 중왕국시대-기원전 1928~1600년경, 예술의 부흥이 이루어진 시기로 정치가 안정된 중왕국 시대부터였다.. 이때는 고왕국시대 인물상의 위엄 있는 무표정과는 대조적으로 근심이나 비애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는 왕들의 초상 조각이 주목을 끌었다.

인물과 문구를 배치하는 데에 여백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세련미를 한층 높아지는 시기로 파이윰 오아시스 부근의 피라미드와 신전들의 규모는 더 작아졌고, 주로 말린 벽돌과 석재포장을 사용했다. 그러나 특히 부조와 회화는 뛰어난 기량을 보였는데, 이 시기의 가장 훌륭한 부조작품은 테베의 다이르알바리에 있는 멘 투호 테프 2세의 무덤과 카크나크에 있는 세소스트리스의 작은 사원에서 볼 수 있다.

 

5. 신왕국시대 및 말기 왕조시대-기원전 1567~1085년으로 다시 한 차례의 정치적 격변기를 거친 뒤 신왕국시대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예술의 개화가 이루어진다.

왕실무덤들은 도굴과 훼손을 피하기 위해 산봉우리가 우뚝 솟은 테베의 궁벽한 골짜기에 모아 세워졌다. 신전, 사당, 암벽 무덤, 명문 비석 등이 나일강 계곡을 따라 이집트와 누비아 곳곳에 건립되었다.

이른바 ‘왕들의 계곡’에는 입구는 숨겼고 정면 현관에 주랑을 설치하고 명문을 새겨 웅장하게 만들기도 하고 종종 이리저리 얽혀 복잡한 미궁을 이루고 있으며 회랑 내부에는 가짜 문이 달린 사당을 만들었다. 숨기는 방법은 석회석 암벽을 깊이 파서 무덤을 만들어 아무 외부 구조물 없이 다만 무덤 입구의 암벽 표면에만 표시해 놓았다.

콤 옴보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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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사 시대 미술

 

        - 선사 시대 미술의 특징

미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 그 자체이며 땅에 묻힌 것이 출토되거나 사람들이 보존하여 물려받은 미술품을 기준으로 그 작품이 생겨난 시대적 배경과 작가, 작가의 특성 등을 중심으로 분류되고 있다. 역사적 사건과 밀접하여 미술사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역사도 같이 이야기할 수 있어 정말 흥미진진하다.

조각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예술품은 짐승의 뼈, 상아, , 사슴의 뿔로 만든 조각들이다. 날카로운 도구로 윤곽을 새겨 넣은 얕게 새김을 한 조각이나 깊이 새긴 양각 부조와 3차원적인 환조도 있다.

B.C. 30,000년에서 25,000년으로 추정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이라는 작은 조각품은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최초의 미술작품 중 하나라 이야기하고 있다. 이때 고대 미술 작품은 보기 위한 용도가 아닌 종교적인 이유이거나 자손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대부분 유럽과 남부 러시아를 걸쳐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재료는 대부분 돌이나 짐승의 뼈를 조각한 작품이거나 동굴 벽에 그려진 벽화들이다.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벽화 같은 벽화는 그 소재는 사람의 모습이나 들소, 야생말, 다른 야생동물 등 일상적이고 그들이 흔히 보는 모습들이다.

 

        - 선사 시대의 역사적 사건

서양미술의 역사의 시작은 고대의 기원전 40000년까지 올라가며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 이후 인류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최초의 미술 형태를 이루는 돌 조각품을 만들게 된다.

네안데르탈인들보다 머리가 좋았던 크로마뇽인이 창의력을 발휘하면서 초월적인 존재에게 염원하고 그 힘을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시기에는 제사장이 권력을 가졌다는 역사적 근거를 보면 종교의 중요성을 더 느낄 수 있다.

구석기시대는 기원전 3만 5000년 전 정도, 중석기 시대는 기원전 8000년 전,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6000년 전부터 기원전 3500년 전 경으로 나타내고 있다.

 

 

❤️ 선사 시대 미술의 의의

이 시대에는 예측불허인 자연의 힘을 통제하고 사람과 짐승의 형상으로 만든 그림과 조각들이 초자연적이고 마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구석기 시대에 사용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를 보면 이미 이때부터 대칭 개념을 알고 있었던 것 같고, 피리 등의 악기도 출토가 되어서 음악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대에 악기라니 참 신기할 따름이다.

또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같은 경우는 그 당시 사람들의 미인상 등 사회적 요소를 살펴볼 수 있고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벽화는 그 지역 사람들이 무엇을 사냥하고 주변에 어떤 동물들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 선사 시대 미술의 대표적인 작품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고고학자 요제프 촘바티가 발견한 11.1 cm 키의 여자 조각상으로 1908년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 근교의 구석기시대 지층에서 나왔고 이후에 조각상 발견지점 주변 유적의 층위를 조사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이 석상은 22000년에서 24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져 있는 것은 매우 적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 벽화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 벽화는 최초의 '회화'라 할 수 있는 것이 기원전 15000넌 전에 그려졌다. 들소, , 매머드, 곰을 그린 이 그림들은 인적이 드물고 어두컴컴한 동굴 깊은 곳에 그려졌다. 고고학자들은 이 그림이 사냥의 성공을 축원하는 의미로 그려졌다고 추정한다. 그림에는 돌이나 화살에 맞은 흔적이 있는데, 아마도 당시 동굴에 살던 인간들이 화살로 그림을 쏘아 맞추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벽화는 발견 당시 지하로 통하는 동굴 입구가 봉해져 있었기 때문에 오래 기간 동안 잘 유지되어서 17000년 동안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벽화들을 보기 위해 수많은 방문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곰팡이 등으로 유실될 위험에 노출이 되었고 이제는 일반 관광객들의 관람을 금하고 있다.

 

최초의 건축물 스톤헨지(Stonehenge)

스톤헨지(Stonehenge)는 거대한 수직의 돌 위에 석판을 얹어 놓아 마치 거대한 탁자 같은 모양을 한 '고인돌(dolmen)'이다. 규모가 큰 것 은 약 5미터 크기, 무게 350톤 정도에 이르는데, 거대한 돌덩이 하나를 세워 놓은 선돌(menhir), 스톤헨지(Stonehenge) 같이 돌덩이들을 원형으로 배치한 환 상열석, cromlech)이 있다.

영국 최초의 석조 건축물로 영국 남부 윌트셔 주 솔즈베리(Salisbury) 평원과 에이브버리에 있는 높이 8미터, 무게 50톤에 달하는 거석 80 여개가 세워져 있다. 수수께끼의 선사시대 유적으로 많은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다.

중세시대에는 고대 거인족이 만들었다고도 했고 마술사 멀린이 마법으로 아일랜드에서 이곳까지 가져온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스톤헨지가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한 천체 달력이었으리라고 짐작만 한다. 또는 묘지일 것이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이 커다란 돌로 이루어진 기념물의 맨 바깥쪽에는 ㅠ 모양의 세 개의 돌로 이루어진 탑, 즉 삼석탑(trilithons, 직립한 두 돌 위에 돌 하나를 얹은 거석 기념물의 일종)이 마치 거대한 문과 같이 버티고 있고, 그 안쪽에는 그보다 작은 규모의 비석 같은 선돌들이 둥글게 늘어서 있다. 더 안쪽으로는 4.5미터 정도 높이의 잘 다듬어진 말편자 모양의 삼석탑이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커다란 이중의 원모양으로 이루고 있으며 중앙에는 제단과 같은 돌이 놓여 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전 3000~ 2000년경으로 추정하며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스톤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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