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얀 판 에이크의 그림

       - 얀 판 에이크의 시대적 배경

르네상스 14세기 때부터 상공업 중계 무역으로 국제 도시가 발달한 네덜란드 일부 남부 지방 그리고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 지대, 플란더스 혹은 플랑드르 지방에 돈이 많았기 때문에 예술이 발달했다.

유화라는 기법을 최초로 만들어 현재까지도 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친 얀 판 에이크는 브리고뉴 공국의 선량왕이라고 많이 부르는데 필립 공의 궁정 화가 및 외교 사절단의 멤버였다. 네덜란드/벨기에의 화가였고 플랑드르 화파의 대표적인 선구자로서, 이후 전반적인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 사조에 영향을 끼쳤다.

이전에는 주로 색깔이 담긴 추출물에 물과 날달걀을 섞어 그림을 그리는 '템페라' 기법을 주로 사용했고 방수 능력이 없어 물에 젖으면 그림이 함께 흘러내려 훼손되었고 캔버스에 그리면 그림이 금방 쩍쩍 갈라지는 단점이 있었다. 그것을 유화로 수정되어서 미술사에 획기적인 발명으로 생각된다. 반 에이크가 이러한 단점들을 보완하는 유화를 도입해서 반 에이크를 유화의 발명자로 보기도 한다. 유화 기법을 사용한 최초의 미술가. 그가 색채 가루(안료)를 최초로 기름에 섞어서 사용, 자연에 대한 세심한 고찰, 정교한 세부 묘사 등으로 인하여 중요하게 여겨진다. 대표작은 어린 양에 대한 경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가 있다.

        - 얀 판 에이크의 자화상의 의미

 

자화상이 되게 유명한데 이전에 화가들은 함부로 자화상을 못 그렸다. 그런데 얀 판 에이크는 그런 시대에 자화상을 그렸다는 것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가까이 확대를 하면 이 주름 하나하나 묘사가 더 디테일하다.
그림 사인으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다른 그림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은근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 얀 판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년 초기 네덜란드 미술의 거장 얀 판 에이크가 오크 화판에 유화로 그린 그림인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라는 작품을 그렸는데 이 작품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그 도시가 상공업으로 발달한 도시였기 때문에 그린 그림이다.
이 아르놀피니라는 상인의 부부 결혼식 모습을 기념해서 그린 것인데 안타깝게도 돌아가신 부인 늘 회상하는 그림이다. 

실내에 있는 조반니 디 니콜라오 아르놀피니와 그의 아내를 그린 초상화이며, 배경의 방은 플랑드르의 브루제에 위치한 그들의 저택일 것 같고 그림을 제작했을 때는 이 아내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고 한다.
남편이 그걸 기리기 위해서 그릴 것 같은 이 그림은 템페라 대신 유화 물감을 쓴 그림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그림이다.

빛을 이용한 실내 공간의 재현은 "방에 살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방 자체의 묘사까지 완벽한 실감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그림의 세밀한 부분까지 묘사했다.

그런데 그림의 모델이 다른 사람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부부라고 한 사람들이 그림이 그려진 지 13년 후이자 얀 판 에이크가 죽은 지 6년 후인 1447년에야 결혼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그림의 모델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조반니 디 아리고의 사촌인 조반니 디 니콜라오 아르놀피니와 그의 아내 중에서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두 번째 아내로 추정를 그린 것이라는 주장, 1433 2월에 사망한 첫 번째 아내 코스탄자 트렌타라는 가설, 반 에이크가 베를린에서 그린 초상화의 모델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그가 화가의 친구라는 주장 등이 제기되었다.

 

그린 그림 중에서 꺼진 불씨를 그렸는데 이는 죽은 부인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지 주장하는데 반 에이크가 그린 조반니 아르놀피니의 초상을 보면, 이 그림에 묘사된 남자의 얼굴과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 묘사된 남자의 얼굴은 상당히 흡사하다고 한다. 또 그림 중에 초 하나가 켜진 것은 유일신을 암시한다는 말도 있고 다양한 해석이 있기는 하다.
그림 속의 부부가 결혼하는 장면이라고 전제한다면 두 남녀의 맞잡은 손에 집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풍습으로 볼 때 서로의 오른손을 잡아야 정식 결혼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결혼인 것을 알리는 증거로 남자는 왼손으로 여자의 오른손을 잡고 있다. 당시에는 남자와 여자의 신분적 차이가 큰 경우 첩을 들이는 것과 비슷한 개념으로 '왼손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중간 중간 그려진 과일들을 통해서 당시에 아르노피니 부부의 사회적 지위, 부를 과시하는 모습을 알 수 있가. 또 옷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여인이 입은 옷의 패션은 실제 이 여인이 임신한 게 아니라 당시에 다산을 기원하는 하나의 패션이었다 보고 있다.


그림이 그려진 이 방은 침실이 아니라 응접실로 창문 밖으로 열매를 맺고 있는 체리 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부부가 여름철 2층 방의 모습을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프랑스와 부르고뉴 지방에서는 응접실에 침대를 두는 것이 유행했고 창문을 보면 목재로 만들었고 최상단에 끼워진 유리는 밝은 과녁 문양의 스테인드 글라스이다.

 

디테일 묘사의 시작된 것은 오일 페인팅의 시작이다. 강아지도 엄청 디테일하다.
살아 있는 것 같은 묘사를 했으며 옷감 묘사 반사된 이 거울 화가의 자화상도 이렇게 짧게 그려놓았다.

유화라는 물감이 발명됐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 때 회화라는 장르가 특히 발달했다고도 볼 수가 있다.
이 기법은 이탈리아의 기법이 전수되었다고 하는데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이라는 화가가 이탈리아 여행하면서 이 오일 페인팅 기법을 전수해줬다고 많이 보았다.

반 에이크가 수태고지를 그렸는데 갈라진 게 마치 돌 같고.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묘사한 그만큼 디테일한 묘사가 어느 정도인지를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작품 사이즈 훨씬 작다.
그래서 실제로 되게 작은 사이즈의 그림인데 작은 세필로 이걸 하나하나 다 묘사를 했다
수태고지라는 주제로 어떻게 사람이 이 정도까지 디테일하게 묘사를 할까 감탄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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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 화가들

        - 조토 디 본도네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 133718)는 이탈리아의 화가·건축가이다.

조토 디 본도네의 지오토를 르네상스의 시초로 많이 본다.
대표적 작품 중 하나가 유다의 옛 맞춤이라는 그림이다.
여기서 르네상스의 시작이라 생각할 수가 있는 조건은 중세 하면 아주 평면적으로 보통 묘사되어 있는데 이 그림은 그렇지 않다.
조토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서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피렌체 파를 형성하였다. 마침내 투시법에 의한 공간의 묘사에 성공하였으며, 생기 있는 묘사로 종교 예술의 신경지를 개척하였다.

천을 보면 입체적 효과가 나오기 시작하며 주제나 도상에 있어서는 중세 기독교 예술과 비잔틴 예술을 답습하였지만, 투사법과 단축법을 통한 공간감의 표현 그리고 사실적인 표정 묘사와 더불어 기존의 도상에 대한 과감한 변화와 같이 훗날 16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예술의 특징으로 향해가는 선구자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얼굴도 살짝 부드러운 명암 처리가 되어 있어 당시에는 엄청 발전된 스타일이었다.
지금 봤을 때는 너무 투박해 보일 수도 있으나 그 당시에는 시대를 앞서가는 스타일이었다.
동시대의 사람인 단테(1265-1321)'치마부에의 시대는 갔다. 지금부터는 지오토의 시대다'라고 극찬했고 프란체스코 성당의 벽화 <성프란체스코전>에 참여해 2828점 중 일부의 벽화를 그렸다.

조토가 그렸던 그림 중 <동방박사의 경배>에는 핼리 혜성으로 추정되는 천체가 베들레헴의 별로 그려져 있어 1986년 유럽에서 발사한 핼리 혜성 탐사선의 이름으로 붙여지기도 했다.

 

조토의 스승인 치마부에가 외출하자 어린 조토가 스승의 그림 속 얼굴에 파리를 그려놓았더니 돌아온 스승이 파리를 손으로 쫓으려 했다는 일화가 있다.

조토는 많은 종교화를 그렸다.

 

 

조토의 애도


그중 애도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죽음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 천사들의 슬퍼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표정 묘사가 나왔다. 자연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조토는 정면에서 벗어나 측면과 후면을 묘사하는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공간감을 만들어 냈으며 단축법, 투시법과 명암을 이용해 평면에 입체감을 표현한 인물이다이전에 종교화에서 표정 묘사가 없었는데 새로운 경향이 나왔다. 희노애락의 표정이 다 숨겨져 있다고 봐도 된다. 이전까지 단순히 사실 기록을 위한 도구였던 회화를 작가의 감정을 보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매체로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르네상스 시대 때 화가는 종합 아티스트였는데 대다수가 건축도 다 했고 시인, 학자이기도 했다.
조토는 산타 마리아 델 피어의 종탑 성당을 디자인했다.

프란체스코 성당의 벽화 <성프란체스코전>에 참여해 2828점 중 일부의 벽화를 그렸다. 그 후 1303~1305년까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파도바의 아레나 예배당이라고도 불리는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장식을 맡는다. 3개의 층으로 나뉜 38개의 구획들은 성가족과 예수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화로 채워져 있다

 

 

        - 도나토 디 니콜로 디 베토 바르디

얕은 돋을새김 조각으로 유명한 도나토 디 니콜로 디 베토 바르디(이탈리아어: Donato di Niccolò di Betto Bardi, 1386년경 ~ 14661213)는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 조각가이다

르네상스 초창기에는 도나텔로가 있어서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로 조각의 역사를 새로 쓰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보는 편이다. 
이전 시대에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이전에 적장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 다비드 다비드가 아주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의 모습으로 봤을 때는 도나토의  다비드가 구약 성서의 종교화의 주제로는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한다.

특이하게 좀 여기서는 모자를 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고 미켈란젤로처럼 과도한 근육 묘사는 하지 않았고 좀 절제되어 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으로 따지면 좀 어린애다운 약해 보이는 좀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보이며 과장된 근육과는 좀 다르게 좀 더 자연스러운 소년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 다비드 상이다.

기베르티, 브루넬레스키와 더불어 '르네상스 초기의 3대 조각가'로 불리며 대표작으로 <성 조르조 상> <다비드> 등이 있는 도나텔로는 로마에서 고대 조각을 연구하고 일찍부터 명성을 얻었다. 작품 경향은 중세적 자연주의의 전통과 고전의 형태미에 의하면서 차츰 새로운 힘찬 사실주의로 발전하였다. 특히 원근법을 써서 입체감을 나타내어, 있는 그대로의 사실주의적인 표현에 힘썼다. <가타멜라타의 가마상>은 특히 뛰어나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도나텔로의 예술을 형성한 데는 브루넬레스코와 함께 로마에 유학한 사실을 들 수 있다. 대머리이기 때문에 <로 츠코네>라 불리는 상은 피렌체 대성당 종루의 감실용으로 제작된 것인데(14231425) 그의 철저한 사실을 실증하는 작품이다.

그는 융기한 목의 근육과 굽어진 손목, 중후한 의상, 응시하는 표정은 과연 힘 있는 남성적 리듬을 가지고 있다. 

일반 사람들과 같은 <그리스도 상>(1420?), 말라 빠져 추악한 <막달라 상>(1455?), <세례자 요한 상>(1455) 미라고 하는 추상적 표준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억센 인간성을 극명하게 묘사하려고 시도했다. 이것과 같은 계열에 속하는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이다.

 

 

청동 다비드 상

그러나 1440년경의 청동 <다비드 상>은 독립 조상인데, 종래의 전통을 파괴하고 있다. 그 평정한 자태의 표현은 고대 양식의 충실한 번역이라 하겠다. 가느다란 팔과 딱딱한 체구에는 우미한 곡선은 없지만 그의 예리한 관찰로 미성숙한 남자상을 남김없이 포착하고 있다. 토스카나 지방의 목동이 쓰는 것과 같은 모자는 다소 기묘한 감을 주지만 그 비고전적인 면모에 내려진 음영에는 개인적이고 성격적인 것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특수성과 일반성의 결합이나 나체상에 비범한 인상을 부여하고 있다.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파도바의 산 탄토니오 성당 앞 광장에서 있는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1453)이다. 갑옷과 안장에 풍부한 장식을 다는 것으로 기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커다란 말에 끌리기 쉬운 사람에게 주의를 쏠리도록 노력하였다.  그가 로마에서 보았던 카피톨리노 언덕 위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을 본으로 한 것이다. 인체와 마찬가지로 마체에도 해부학적인 정확함을 추구하였고, 다리와 코에 정맥이 부풀어 나오게 했고, 또 두부의 딱딱한 구조와 피부에도 극명한 현실의 관찰을 볼 수 있으며, 안장의 모포와 갑옷의 옷감 성질에 대해서까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초기 르네상스에 있어서 군상(群像)의 안정과 정밀이란 고전적 효과는 그 양괴성과 평형감으로 표시되었다. 말 탄 자의 수직선, 장군이 가진 칼과 지휘봉으로 구성된 날카로운 대각선, 커다란 말의 수평적인 중량감 및 말의 네 발이 만드는 삼각형이 기묘한 교차를 보여 주고 있다. 왼쪽 앞발 아래에 있는 구슬은 물리적 평형을 갖기 위해서도, 대좌에서 전진하려는 말을 저지시키는 데에도, 실제상의 필요에서나 장식상에서나 다 같이 군상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한 사람의 유능한 장군의 풍모를 표현한 점에서 벌써 뛰어난 초상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나아가서 고전적 형식을 빌어 하나의 전형적인 인물을 구체화한 점으로 그것은 초상 이상인 것이다. 고대에 대한 공감과 철저한 사실과 근대적 지성, 그리고 인생의 희비극을 뚫어 보는 통찰 등, 이것을 무기로 하여 그는 초기 르네상스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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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 시대 회화, 그림 특징

        -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회화의 특징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과의 활발한 교류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파괴되었던 고대 로마의 문헌과 기술력을 거의 복원했던 이탈리아 반도는 이슬람 제국에 의해 동로마가 멸망했을 때 서방으로 피난한 동로마 예술가 기술자 등 지식인이 여기로 왔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고, 그 전통이 기독교 세계로 편입된 이후에도 남아 있었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로마 유적만 봐도 알 수 있듯 고대 로마의 문화는 여전히 이탈리아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북이탈리아의 파도바와 베로나는 계속하여 베네치아에게 정복당하여 신문화와 연결이 되지만 처음에는 오히려 위의 두 도시가 능동적이었다. 총독 저택을 장식한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뒤를 이어서 피사넬로는 국제 고딕 양식을 베네치아에 가지고 가서, 우아한 성모자(聖母子), 공상적인 의상, 우화동물 등 장식 문양적인 표현이 북이탈리아에 퍼졌다.  

알베르티, 브루넬레스키가 건축에서, 그리고 기베르티, 도나텔로가 조각에서 이룬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이 회화에 있어서는 마사초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사리의 열전(列傳)에 기술된 것처럼, 그가 프레스코화를 그린 피렌체에 있는 카르멜회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회는 많은 르네상스 화가들의 수업의 도장이 되었다.

마솔리노와 같은 화가가 베네치아에 머물면서 신경향의 양식도 전했던 것이다. 필리포 리피, 우첼로, 카스타뇨 등 피렌체의 화가들은 북이탈리아에서 한때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1306년 조토가 스크로베니 경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1443년~1453년 10년간 도나텔로가 산토의 주제단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을 제작하였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피렌체 파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여 르네상스 미술의 주류를 이루었던 피렌체 파는14세기로부터 16세기 동안 회화에서는 주제에 관련이 있는 것만을 단순화하고, 또 이를 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마사초, 브루넬레스키 등의 투시도적 수법과 도나텔로의 조형적 성과를 도입한 다음부터는 회화적 현실의 표현에 신천지를 개척하였다.

장식적인 시에나 파와 대립하였고 ‘공간 구성은 화면 안의 통일이다라는 고딕과는 다른 형식의 회화를 만들어냈다.  

자연주의는 1400년대 예술의 주류가 되었으며, 자연과학의 발흥과 더불어 인체묘사·운동묘사·풍경묘사 등에서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한 피렌체 파의 사실적 성과는 메디치가의 번영에 힘입어 르네상스 회화 발전의 주류가 되었다. 

1500년대에는 보티첼리는 만년에 이르러 이상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보여주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사실주의를 완성하면서부터 주관적 정신 내용을 그 속에 표현하였다. 

바로크 양식의 선구자가 된 미켈란젤로는 강인한 인체 표현 속에 인간의 정신적 고뇌를 표현하였는데, 그 초월적 방향으로써 피렌체파의 최종적 단계를 장식하였.

처음에는 르네상스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일어났지만 피렌체 출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영향으로 과학을 바탕으로 한 이성적인 성격도 아주 강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회화의 네 가지 혁신 중에서 세 가지인 원근법, 명암법, 피라미드 구조가 이때 아주 명확하게 나타났다.

르네상스의 목적은 미술의 수단이 아닌 미술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는데 과학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림으로써 미술의 권위를 격상시켰다.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북유럽에도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북유럽에서는 유화를 발명한 얀바 네이크, 독일의 할스 홀바인과 듀러 등이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유화가 발명되면서 세심한 표현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보다 더 사실적인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전성기 르네상스에서 원근법, 명암법 등 법칙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독창성과 개성을 위주로 회화가 발전하였다.

     -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베네치아파

정확한 시기를 몰라 수수께끼에 싸인 《태풍》(1505?)은 폐허가 된 어느 조용한 촌락을 배경으로 하여, 바른쪽 잔디 위에서 젖을 물린 나체의 부인이 앉아 있고 왼쪽 끝에 젊은 병사가 서 있다. 때마침 구름은 낮게 깔려 있으며 번개마저 번쩍인다.  이 그림을 그린 조르조네는 조반니 벨리니 이래 색채를 구사하여 특이한 화풍을 세운 베네치아파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그리스의 화가라 명칭 되는 페아레스라면 어느 누구든 그릴 수 없는 태풍을 그렸다는 것은 고대의 기록에 대한 도전이라 여겼다. 

그의 잠자는 비너스는 밝은 광채 아래 풍만한 미를 드러내어 놓고, 그리스의 조각가도 미치지 못하는 관능미를 현실화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탈리아 반도가 나폴리와 교황령을 제외한 수많은 도시국가와 소국들로 분열되어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지 못했고 중세 유럽을 지배하고 중세 사람들의 삶을 결정짓던 대표적인 체제인 봉건제가 유독 이탈리아에서는 발전하지 못했기 가능했다

 

12세기부터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무슬림 해적을 소탕하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에 지중해를 장악하여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중계무역 특성상 여러 나라의 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높기 때문에 많은 문물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도시의 상인들은 부와 힘을 얻고 교양과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조르조네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는 평온한 정원의 정서를 베네치아 시민의 실내로 바꾸어, 한층 더 화려한 색채의 음악적 표현을 더하였다.

계란이 섞이는 프레스코화에 맞지 않는 항구인 베네치아에서는 비잔티움의 모자이크가 애호되었는데, 

나중에는 북방에서 전래한 유채화법이 베네치아에서 채용되어 회화 역사상 큰 변화를 몰고 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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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 시대 미술

        -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개념

중세를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잡는 의견은 다양한데 보통 1453년의 동로마 제국의 멸망이나 1521년의 루터교회의 출현으로 잡으며 1304~1374의 페트라르카의 시대가 중세라는 의견이 많은 편이다.

 

르네상스 미술은 1400, 그러니까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이탈리아에서 철학, 문학, 음악, 과학, 기술의 발전을 같이 하면서 서유럽에서 일어난 문화계의 변화한 현상으로 회화, 조각, 공예 등에서 생겨났다.

르네상스는 예술의 부활이라는 의미로 미술이 수단으로 여겨지던 중세 미술에서 탈피하여 미술의 그 자체를 인정해 주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로 돌아가자는 의미이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기본적인 성격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복원을 추구한다.  그래서 문예 부흥으로 번역된다. 

용어로서 르네상스의 의미는 '재생', '부활'이며 그 어원은 조르조 바사리의 책 1550년의 예술가 열전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그리스와 로마의 재림이라 하여 이탈리아어로 리나시타(rinascita, 부활)이라 거론한 것이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 중심이었던 중세 봉건 사회가 붕괴되고 상공업을 통한 근대 도시가 발달하면서 신 중심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가치가 변화했다. 이때부터 신을 위한 미술이 아닌 인간과 자연의 현실 세계를 위한 미술을 과학적인 법칙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일반적으로는 중세적인 문화가 쇠퇴하고 근세적인 문화가 성립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교황권이 약화되고 중세 흑사병 등과 도시의 발달 등으로 봉건 제도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문화 변화로, 그렇게 중세적 문화를 부정하고 근세적 문화를 성립했다고 생각된다.

프랑스의 역사가였던 쥘 미슐레가 '르네상스(Renaissance, 재탄생)'(re, 다시 + naissance, 탄생)으로 번역하고, 스위스의 역사가였던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확실하게 정의 내린 것이다.

 

돈의 논리 혹은 배금주의와 반대에 있는 인문주의는 인간다움을 중요시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는 인간주의, 인문주의라고 하기도 하며, 인도주의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따라서 '인간애'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부르크하르트는 인문주의자들이 신이 모든 것의 중심인 기독교의 신본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였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절로 회귀하려 한 운동, 즉 인문주의라고 해석했다. 다만 르네상스식 인문주의가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인간'을 의미한다는 해석에는 많은 반론이 쌓여있다.

 

그 반론으로는 예술과 문화에서의 성취가 개인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문명화’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미슐레, 부르크하르트, 페이터는 르네상스를 역사의 한 시대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신으로 바라보는 19세기식 개념을 만들어냈다. 르네상스를 이런 식으로 정의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는데, 15세기부터 계속된 현상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설명을 제시하기보다 그것을 19세기 유럽 사회의 이상향으로 설명한다

 

❤️ 르네상스 시대 회화의 혁신

르네상스 회화에서는 4가지의 혁신이 나타나게 되었다.


첫 번째 혁신은 멀고 가까운 것을 표현하여 공간감을 나타나게 해 준 원근법이다.
원근법은 브루넬레스키라는 건축가에 의해 처음 발명 되었다. 원근법이란 하나의 소실점을 기준으로 우리 눈에서 가까운 것은 크게 먼 것은 작게 그리는 방법으로 1차원의 평평한 그림에 3차원의 입체적인 공간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 혁신은 밝고 어두움을 통해 입체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명암법이다. 먼저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에 그려진 수태고지 그림으로 명암법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중세 시대의 고딕 양식으로 그려졌던 이 수태고지는 선을 위주로 평평한 느낌이 드는 반면에 르네상스 시대의 이 스테고지는 명암법을 통해 어두운 곳과 밝은 곳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입체감이 느껴진다.

세 번째 혁신은 그림의 세밀한 표현을 가능하게 해 주고 내구성을 높여준 유화의 발견이다.
유화는 얀반 에이크라는 화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전에는 가루 형태인 물감 안료를 계란 노른자나 벌꿀에 개어서 사용하는 템페라라는 물감을 사용하여 금방 물감이 썩어버리거나 떨어져 버려 내구성이 낮고 정도가 낮아서 표현이 어려웠다.
얀반 에이크가 계란 노른자 대신 기름을 섞어서 써보았더니 훨씬 내구성도 좋고 부드럽고 세밀한 표현이 가능해지고 그림의 퀄리티가 훨씬 좋아지게 되었다.
네 번째 혁신은 수학적인 비례를 통해 안정적인 느낌을 준 피라미드 구도이다.
피라미드 구도란 마사치오라는 화가에 의해서 보완된 구도로 마치 이집트에 있는 피라미드처럼 그림을 배치하는 방식이다.
피라미드 구도는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암굴의 성모라는 이 작품에서도 이렇게 피라미드 구도가 들어있다.

이러한 피라미드 구도는 황금 비례와 마찬가지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정적인 느낌을 받게 한다.

 

❤️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화파의 특징

        - 피렌체 화파

이탈리아에 로마의 유적과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기도 했고 교황이나 군주 등 예술의 후원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르네상스의 주요한 화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마사치오의 아담와 이브의 낙원추방


먼저 피렌체 화파는 마사치오라는 화가를 중심이며 그림에서 인물을 중심에 두었고 명확한 윤곽선을 통해 정확한 형태와 양감을 표현하고 안정적인 구조로 꽤나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에 의해 그림을 그렸다.

 

       - 베네치아 화파

 

조르조네의 폭풍

베네치아 화파는 조르조네라는 화가를 중심으로 그림에서 인물보다는 풍경 중심으로 형태나 이성보다는 현실주의적인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다.
피렌체 화파와는 사뭇 다르게 빛이나 색 분위기를 중점으로 두며 역동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는 등 상당히 감성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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