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오나르다 다빈치의 일생과 미술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소년 시절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의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다.
다빈치라는 용어가 익숙해서 성시로 생각하기 쉬운데 다빈치는 그가 빈치 마을의 출신이라는 뜻이다.
그의 본명은 레오나르도 디세르 피에로 다빈치로 세르 피에로의 아들 레오나르드였다.
레오나르도의 아버지는 변호사였으며 어머니는 농민이었는데 사생아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서 신분상의 활동 제약이 있었다..

그나마 이탈리아는 다른 나라들보다 사생아에 대한 대우가 괜찮은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나 약사는 될 수가 없었으며 대학에도 진학할 수 없었다.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레오나르도가 합법적인 아들이었다면 공부를 시켰을지도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대학 진학이 불가능했기에 아들을 피렌체로 보냈다.
피렌체를 대표하는 도나텔로의 가장 우수했던 제자로 조각과 회화 등 다방 면에서 재능을 보였던 베로키오라는 화가의 공방에 수습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도나텔로의 사후 베로키오는 도나텔로의 후계자로서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는 미술가가 되었으며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가진 미술가라 할 수 있었다.
10대 중반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벨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가서
다른 수습생들처럼 청소와 잔심부름 등을 하며 미술을 배워나갔다. 그렇게 붓을 닦고 알료를 받는 등의 일을 하면서 그림 실력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레오나로도 다빈치는 공방 생활을 하는 동안 스승행 베로키오 외에도 보티첼리를 비롯해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을 마주하게 되면서 점점 능력을 키워나갔다.

베로키오는 당시 이탈리아 피렌체의 대표적인 화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페루지노 산드로 보티첼리의 스승이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청년 시절


그렇게 다빈치는 20살에 베로키오의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수로 참여해 화면 속에 보이는 꼬마 천사 두 명을 맡게 되었다. 
이후 1466년부터 1482년을 그의 제1의 피렌체 시대라고 부르는데 당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수태를 예고하는 부분을 표현한 수태고지 등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1482년부터 1499년을 제1의 밀라노 시대로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었는데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걸작 중 하나로 불리는 암굴의 성모와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모나리자를 그리는 화법의 바탕이 되는 스푸마토라는 다빈치의 화법으로 암굴의 성모가 제작되었다.
3차원의 세계를 그리는 방법으로 대기 원근법이라고도 불리죠 쉽게 말해서 회화에서 색과 색 사이의 경계선 구분을 부드럽게 처리하는 방법이다.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의 성당 수도원의 식당 벽화로 그려진 최후의 만찬은 다빈치의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의 요청으로 그린 그림이다. 
가로 880cm에 새로 460cm나 되는 거대한 작품이며 다빈치는 1495년부터 최후의 만찬 제작에 착수하여 3년 후인 1498년에 그림을 완성시켰다. 

수학적 계산으로 접근한 대칭적인 구도와 원근법 그리고 각 인물들의 성격을 바탕으로 그린 표정과 그들의 행동들은 당시 최후의 만찬의 장면을 드라마틱하고 섬세하게 표현한 걸작인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하루 전날 자신의 열두 제자들과 함께 가진 식사를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다.

예수는 누군가가 자신을 팔아먹을 것이라 말하고 그림에 범인이 누구인지 힌트를 주는 동시에 그 말을 듣고 놀라는 제자들의 제각각의 반응도 아주 잘 나타내었다. 소실점으로 다빈치는 원근법을 처음으로 나타내었다.

 

그다음으로 고대 로마의 건축과 비트르비우스가 쓴 건축 1 3장의 심장 건축 편에서 인체의 비율을 말한 것으로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원과 정사각형 안에 팔다리를 뻗고 있는 남자가 이상적인 인체 비율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팔이나 다리를 뻗으면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인 정사각형과 원에 드러났기 때문이다라고 쓴 대목을 읽고 그렸다고 전해진다.

이 그림을 보면 팔과 다리를 벌렸을 땐 이렇게 원에 딱 들어가고 다리를 붙였을 때 정사각형에 딱 들어가게 된다. 
똑바로 산 사람을 보았을 때 배꼽을 기준으로 머리끝까지와 발 끝까지의 비율은 11.61 8로 오늘날에도 디자이너들이 사용하는 황금 비율의 시초가 바로 다빈치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2 밀라노 시대와 모나리자

1500년부터 1506년을 그의 제2의2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그는 1499년 프랑스 왕 의 12세의 밀라노 침입으로 1500년의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제단화를 그리고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어 1506년 밀라노에서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우리 12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는데 1506년부터 1513년을 그의 제2의 밀라노 시대라고 한다.

1516년 프랑스 여왕 프랑스와 1세의 초청을 받아 그의 제자와 함께 이주해서 세 점의 그림을 완성시킨다.
이때 완성된 모나리자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다빈치가 그린 초상화로 현재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모나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어 경칭이며 리자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을 나타낸다.

가로 53cm의 새로 77cm 크기의 패널 위에 그린 유화이며 1503년에서 1519년경에 완성되었다고 추정된다.
모나리자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여인의 그린 초상화로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하여 넓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어 미스터리함을 풍기는 그림이다.

구도는 당시 가장 기본적인 초상화의 구도였던 피라미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인물을 배경보다 높게 배치하는 방식은 오늘날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기법이지만 르네상스 시대는 보기 드문 방식이다.
모나리자의 여인에게는 눈썹이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가늘게 그려져 있다..
당시에는 이마가 넓은 여자가 미인으로 여겨져 눈썹을 밀거나 가늘게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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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 판 에이크의 그림

       - 얀 판 에이크의 시대적 배경

르네상스 14세기 때부터 상공업 중계 무역으로 국제 도시가 발달한 네덜란드 일부 남부 지방 그리고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 지대, 플란더스 혹은 플랑드르 지방에 돈이 많았기 때문에 예술이 발달했다.

유화라는 기법을 최초로 만들어 현재까지도 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친 얀 판 에이크는 브리고뉴 공국의 선량왕이라고 많이 부르는데 필립 공의 궁정 화가 및 외교 사절단의 멤버였다. 네덜란드/벨기에의 화가였고 플랑드르 화파의 대표적인 선구자로서, 이후 전반적인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 사조에 영향을 끼쳤다.

이전에는 주로 색깔이 담긴 추출물에 물과 날달걀을 섞어 그림을 그리는 '템페라' 기법을 주로 사용했고 방수 능력이 없어 물에 젖으면 그림이 함께 흘러내려 훼손되었고 캔버스에 그리면 그림이 금방 쩍쩍 갈라지는 단점이 있었다. 그것을 유화로 수정되어서 미술사에 획기적인 발명으로 생각된다. 반 에이크가 이러한 단점들을 보완하는 유화를 도입해서 반 에이크를 유화의 발명자로 보기도 한다. 유화 기법을 사용한 최초의 미술가. 그가 색채 가루(안료)를 최초로 기름에 섞어서 사용, 자연에 대한 세심한 고찰, 정교한 세부 묘사 등으로 인하여 중요하게 여겨진다. 대표작은 어린 양에 대한 경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가 있다.

        - 얀 판 에이크의 자화상의 의미

 

자화상이 되게 유명한데 이전에 화가들은 함부로 자화상을 못 그렸다. 그런데 얀 판 에이크는 그런 시대에 자화상을 그렸다는 것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가까이 확대를 하면 이 주름 하나하나 묘사가 더 디테일하다.
그림 사인으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다른 그림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은근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 얀 판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년 초기 네덜란드 미술의 거장 얀 판 에이크가 오크 화판에 유화로 그린 그림인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라는 작품을 그렸는데 이 작품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그 도시가 상공업으로 발달한 도시였기 때문에 그린 그림이다.
이 아르놀피니라는 상인의 부부 결혼식 모습을 기념해서 그린 것인데 안타깝게도 돌아가신 부인 늘 회상하는 그림이다. 

실내에 있는 조반니 디 니콜라오 아르놀피니와 그의 아내를 그린 초상화이며, 배경의 방은 플랑드르의 브루제에 위치한 그들의 저택일 것 같고 그림을 제작했을 때는 이 아내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고 한다.
남편이 그걸 기리기 위해서 그릴 것 같은 이 그림은 템페라 대신 유화 물감을 쓴 그림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그림이다.

빛을 이용한 실내 공간의 재현은 "방에 살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방 자체의 묘사까지 완벽한 실감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그림의 세밀한 부분까지 묘사했다.

그런데 그림의 모델이 다른 사람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부부라고 한 사람들이 그림이 그려진 지 13년 후이자 얀 판 에이크가 죽은 지 6년 후인 1447년에야 결혼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그림의 모델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조반니 디 아리고의 사촌인 조반니 디 니콜라오 아르놀피니와 그의 아내 중에서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두 번째 아내로 추정를 그린 것이라는 주장, 1433 2월에 사망한 첫 번째 아내 코스탄자 트렌타라는 가설, 반 에이크가 베를린에서 그린 초상화의 모델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그가 화가의 친구라는 주장 등이 제기되었다.

 

그린 그림 중에서 꺼진 불씨를 그렸는데 이는 죽은 부인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지 주장하는데 반 에이크가 그린 조반니 아르놀피니의 초상을 보면, 이 그림에 묘사된 남자의 얼굴과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 묘사된 남자의 얼굴은 상당히 흡사하다고 한다. 또 그림 중에 초 하나가 켜진 것은 유일신을 암시한다는 말도 있고 다양한 해석이 있기는 하다.
그림 속의 부부가 결혼하는 장면이라고 전제한다면 두 남녀의 맞잡은 손에 집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풍습으로 볼 때 서로의 오른손을 잡아야 정식 결혼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결혼인 것을 알리는 증거로 남자는 왼손으로 여자의 오른손을 잡고 있다. 당시에는 남자와 여자의 신분적 차이가 큰 경우 첩을 들이는 것과 비슷한 개념으로 '왼손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중간 중간 그려진 과일들을 통해서 당시에 아르노피니 부부의 사회적 지위, 부를 과시하는 모습을 알 수 있가. 또 옷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여인이 입은 옷의 패션은 실제 이 여인이 임신한 게 아니라 당시에 다산을 기원하는 하나의 패션이었다 보고 있다.


그림이 그려진 이 방은 침실이 아니라 응접실로 창문 밖으로 열매를 맺고 있는 체리 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부부가 여름철 2층 방의 모습을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프랑스와 부르고뉴 지방에서는 응접실에 침대를 두는 것이 유행했고 창문을 보면 목재로 만들었고 최상단에 끼워진 유리는 밝은 과녁 문양의 스테인드 글라스이다.

 

디테일 묘사의 시작된 것은 오일 페인팅의 시작이다. 강아지도 엄청 디테일하다.
살아 있는 것 같은 묘사를 했으며 옷감 묘사 반사된 이 거울 화가의 자화상도 이렇게 짧게 그려놓았다.

유화라는 물감이 발명됐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 때 회화라는 장르가 특히 발달했다고도 볼 수가 있다.
이 기법은 이탈리아의 기법이 전수되었다고 하는데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이라는 화가가 이탈리아 여행하면서 이 오일 페인팅 기법을 전수해줬다고 많이 보았다.

반 에이크가 수태고지를 그렸는데 갈라진 게 마치 돌 같고.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묘사한 그만큼 디테일한 묘사가 어느 정도인지를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작품 사이즈 훨씬 작다.
그래서 실제로 되게 작은 사이즈의 그림인데 작은 세필로 이걸 하나하나 다 묘사를 했다
수태고지라는 주제로 어떻게 사람이 이 정도까지 디테일하게 묘사를 할까 감탄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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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 화가들

        - 조토 디 본도네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 133718)는 이탈리아의 화가·건축가이다.

조토 디 본도네의 지오토를 르네상스의 시초로 많이 본다.
대표적 작품 중 하나가 유다의 옛 맞춤이라는 그림이다.
여기서 르네상스의 시작이라 생각할 수가 있는 조건은 중세 하면 아주 평면적으로 보통 묘사되어 있는데 이 그림은 그렇지 않다.
조토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서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피렌체 파를 형성하였다. 마침내 투시법에 의한 공간의 묘사에 성공하였으며, 생기 있는 묘사로 종교 예술의 신경지를 개척하였다.

천을 보면 입체적 효과가 나오기 시작하며 주제나 도상에 있어서는 중세 기독교 예술과 비잔틴 예술을 답습하였지만, 투사법과 단축법을 통한 공간감의 표현 그리고 사실적인 표정 묘사와 더불어 기존의 도상에 대한 과감한 변화와 같이 훗날 16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예술의 특징으로 향해가는 선구자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얼굴도 살짝 부드러운 명암 처리가 되어 있어 당시에는 엄청 발전된 스타일이었다.
지금 봤을 때는 너무 투박해 보일 수도 있으나 그 당시에는 시대를 앞서가는 스타일이었다.
동시대의 사람인 단테(1265-1321)'치마부에의 시대는 갔다. 지금부터는 지오토의 시대다'라고 극찬했고 프란체스코 성당의 벽화 <성프란체스코전>에 참여해 2828점 중 일부의 벽화를 그렸다.

조토가 그렸던 그림 중 <동방박사의 경배>에는 핼리 혜성으로 추정되는 천체가 베들레헴의 별로 그려져 있어 1986년 유럽에서 발사한 핼리 혜성 탐사선의 이름으로 붙여지기도 했다.

 

조토의 스승인 치마부에가 외출하자 어린 조토가 스승의 그림 속 얼굴에 파리를 그려놓았더니 돌아온 스승이 파리를 손으로 쫓으려 했다는 일화가 있다.

조토는 많은 종교화를 그렸다.

 

 

조토의 애도


그중 애도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죽음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 천사들의 슬퍼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표정 묘사가 나왔다. 자연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조토는 정면에서 벗어나 측면과 후면을 묘사하는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공간감을 만들어 냈으며 단축법, 투시법과 명암을 이용해 평면에 입체감을 표현한 인물이다이전에 종교화에서 표정 묘사가 없었는데 새로운 경향이 나왔다. 희노애락의 표정이 다 숨겨져 있다고 봐도 된다. 이전까지 단순히 사실 기록을 위한 도구였던 회화를 작가의 감정을 보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매체로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르네상스 시대 때 화가는 종합 아티스트였는데 대다수가 건축도 다 했고 시인, 학자이기도 했다.
조토는 산타 마리아 델 피어의 종탑 성당을 디자인했다.

프란체스코 성당의 벽화 <성프란체스코전>에 참여해 2828점 중 일부의 벽화를 그렸다. 그 후 1303~1305년까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파도바의 아레나 예배당이라고도 불리는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장식을 맡는다. 3개의 층으로 나뉜 38개의 구획들은 성가족과 예수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화로 채워져 있다

 

 

        - 도나토 디 니콜로 디 베토 바르디

얕은 돋을새김 조각으로 유명한 도나토 디 니콜로 디 베토 바르디(이탈리아어: Donato di Niccolò di Betto Bardi, 1386년경 ~ 14661213)는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 조각가이다

르네상스 초창기에는 도나텔로가 있어서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로 조각의 역사를 새로 쓰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보는 편이다. 
이전 시대에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이전에 적장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 다비드 다비드가 아주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의 모습으로 봤을 때는 도나토의  다비드가 구약 성서의 종교화의 주제로는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한다.

특이하게 좀 여기서는 모자를 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고 미켈란젤로처럼 과도한 근육 묘사는 하지 않았고 좀 절제되어 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으로 따지면 좀 어린애다운 약해 보이는 좀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보이며 과장된 근육과는 좀 다르게 좀 더 자연스러운 소년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 다비드 상이다.

기베르티, 브루넬레스키와 더불어 '르네상스 초기의 3대 조각가'로 불리며 대표작으로 <성 조르조 상> <다비드> 등이 있는 도나텔로는 로마에서 고대 조각을 연구하고 일찍부터 명성을 얻었다. 작품 경향은 중세적 자연주의의 전통과 고전의 형태미에 의하면서 차츰 새로운 힘찬 사실주의로 발전하였다. 특히 원근법을 써서 입체감을 나타내어, 있는 그대로의 사실주의적인 표현에 힘썼다. <가타멜라타의 가마상>은 특히 뛰어나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도나텔로의 예술을 형성한 데는 브루넬레스코와 함께 로마에 유학한 사실을 들 수 있다. 대머리이기 때문에 <로 츠코네>라 불리는 상은 피렌체 대성당 종루의 감실용으로 제작된 것인데(14231425) 그의 철저한 사실을 실증하는 작품이다.

그는 융기한 목의 근육과 굽어진 손목, 중후한 의상, 응시하는 표정은 과연 힘 있는 남성적 리듬을 가지고 있다. 

일반 사람들과 같은 <그리스도 상>(1420?), 말라 빠져 추악한 <막달라 상>(1455?), <세례자 요한 상>(1455) 미라고 하는 추상적 표준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억센 인간성을 극명하게 묘사하려고 시도했다. 이것과 같은 계열에 속하는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이다.

 

 

청동 다비드 상

그러나 1440년경의 청동 <다비드 상>은 독립 조상인데, 종래의 전통을 파괴하고 있다. 그 평정한 자태의 표현은 고대 양식의 충실한 번역이라 하겠다. 가느다란 팔과 딱딱한 체구에는 우미한 곡선은 없지만 그의 예리한 관찰로 미성숙한 남자상을 남김없이 포착하고 있다. 토스카나 지방의 목동이 쓰는 것과 같은 모자는 다소 기묘한 감을 주지만 그 비고전적인 면모에 내려진 음영에는 개인적이고 성격적인 것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특수성과 일반성의 결합이나 나체상에 비범한 인상을 부여하고 있다.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파도바의 산 탄토니오 성당 앞 광장에서 있는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1453)이다. 갑옷과 안장에 풍부한 장식을 다는 것으로 기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커다란 말에 끌리기 쉬운 사람에게 주의를 쏠리도록 노력하였다.  그가 로마에서 보았던 카피톨리노 언덕 위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을 본으로 한 것이다. 인체와 마찬가지로 마체에도 해부학적인 정확함을 추구하였고, 다리와 코에 정맥이 부풀어 나오게 했고, 또 두부의 딱딱한 구조와 피부에도 극명한 현실의 관찰을 볼 수 있으며, 안장의 모포와 갑옷의 옷감 성질에 대해서까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초기 르네상스에 있어서 군상(群像)의 안정과 정밀이란 고전적 효과는 그 양괴성과 평형감으로 표시되었다. 말 탄 자의 수직선, 장군이 가진 칼과 지휘봉으로 구성된 날카로운 대각선, 커다란 말의 수평적인 중량감 및 말의 네 발이 만드는 삼각형이 기묘한 교차를 보여 주고 있다. 왼쪽 앞발 아래에 있는 구슬은 물리적 평형을 갖기 위해서도, 대좌에서 전진하려는 말을 저지시키는 데에도, 실제상의 필요에서나 장식상에서나 다 같이 군상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한 사람의 유능한 장군의 풍모를 표현한 점에서 벌써 뛰어난 초상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나아가서 고전적 형식을 빌어 하나의 전형적인 인물을 구체화한 점으로 그것은 초상 이상인 것이다. 고대에 대한 공감과 철저한 사실과 근대적 지성, 그리고 인생의 희비극을 뚫어 보는 통찰 등, 이것을 무기로 하여 그는 초기 르네상스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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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 시대 회화, 그림 특징

        -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회화의 특징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과의 활발한 교류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파괴되었던 고대 로마의 문헌과 기술력을 거의 복원했던 이탈리아 반도는 이슬람 제국에 의해 동로마가 멸망했을 때 서방으로 피난한 동로마 예술가 기술자 등 지식인이 여기로 왔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고, 그 전통이 기독교 세계로 편입된 이후에도 남아 있었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로마 유적만 봐도 알 수 있듯 고대 로마의 문화는 여전히 이탈리아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북이탈리아의 파도바와 베로나는 계속하여 베네치아에게 정복당하여 신문화와 연결이 되지만 처음에는 오히려 위의 두 도시가 능동적이었다. 총독 저택을 장식한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뒤를 이어서 피사넬로는 국제 고딕 양식을 베네치아에 가지고 가서, 우아한 성모자(聖母子), 공상적인 의상, 우화동물 등 장식 문양적인 표현이 북이탈리아에 퍼졌다.  

알베르티, 브루넬레스키가 건축에서, 그리고 기베르티, 도나텔로가 조각에서 이룬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이 회화에 있어서는 마사초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사리의 열전(列傳)에 기술된 것처럼, 그가 프레스코화를 그린 피렌체에 있는 카르멜회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회는 많은 르네상스 화가들의 수업의 도장이 되었다.

마솔리노와 같은 화가가 베네치아에 머물면서 신경향의 양식도 전했던 것이다. 필리포 리피, 우첼로, 카스타뇨 등 피렌체의 화가들은 북이탈리아에서 한때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1306년 조토가 스크로베니 경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1443년~1453년 10년간 도나텔로가 산토의 주제단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을 제작하였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피렌체 파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여 르네상스 미술의 주류를 이루었던 피렌체 파는14세기로부터 16세기 동안 회화에서는 주제에 관련이 있는 것만을 단순화하고, 또 이를 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마사초, 브루넬레스키 등의 투시도적 수법과 도나텔로의 조형적 성과를 도입한 다음부터는 회화적 현실의 표현에 신천지를 개척하였다.

장식적인 시에나 파와 대립하였고 ‘공간 구성은 화면 안의 통일이다라는 고딕과는 다른 형식의 회화를 만들어냈다.  

자연주의는 1400년대 예술의 주류가 되었으며, 자연과학의 발흥과 더불어 인체묘사·운동묘사·풍경묘사 등에서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한 피렌체 파의 사실적 성과는 메디치가의 번영에 힘입어 르네상스 회화 발전의 주류가 되었다. 

1500년대에는 보티첼리는 만년에 이르러 이상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보여주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사실주의를 완성하면서부터 주관적 정신 내용을 그 속에 표현하였다. 

바로크 양식의 선구자가 된 미켈란젤로는 강인한 인체 표현 속에 인간의 정신적 고뇌를 표현하였는데, 그 초월적 방향으로써 피렌체파의 최종적 단계를 장식하였.

처음에는 르네상스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일어났지만 피렌체 출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영향으로 과학을 바탕으로 한 이성적인 성격도 아주 강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회화의 네 가지 혁신 중에서 세 가지인 원근법, 명암법, 피라미드 구조가 이때 아주 명확하게 나타났다.

르네상스의 목적은 미술의 수단이 아닌 미술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는데 과학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림으로써 미술의 권위를 격상시켰다.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북유럽에도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북유럽에서는 유화를 발명한 얀바 네이크, 독일의 할스 홀바인과 듀러 등이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유화가 발명되면서 세심한 표현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보다 더 사실적인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전성기 르네상스에서 원근법, 명암법 등 법칙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독창성과 개성을 위주로 회화가 발전하였다.

     -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베네치아파

정확한 시기를 몰라 수수께끼에 싸인 《태풍》(1505?)은 폐허가 된 어느 조용한 촌락을 배경으로 하여, 바른쪽 잔디 위에서 젖을 물린 나체의 부인이 앉아 있고 왼쪽 끝에 젊은 병사가 서 있다. 때마침 구름은 낮게 깔려 있으며 번개마저 번쩍인다.  이 그림을 그린 조르조네는 조반니 벨리니 이래 색채를 구사하여 특이한 화풍을 세운 베네치아파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그리스의 화가라 명칭 되는 페아레스라면 어느 누구든 그릴 수 없는 태풍을 그렸다는 것은 고대의 기록에 대한 도전이라 여겼다. 

그의 잠자는 비너스는 밝은 광채 아래 풍만한 미를 드러내어 놓고, 그리스의 조각가도 미치지 못하는 관능미를 현실화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탈리아 반도가 나폴리와 교황령을 제외한 수많은 도시국가와 소국들로 분열되어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지 못했고 중세 유럽을 지배하고 중세 사람들의 삶을 결정짓던 대표적인 체제인 봉건제가 유독 이탈리아에서는 발전하지 못했기 가능했다

 

12세기부터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무슬림 해적을 소탕하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에 지중해를 장악하여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중계무역 특성상 여러 나라의 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높기 때문에 많은 문물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도시의 상인들은 부와 힘을 얻고 교양과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조르조네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는 평온한 정원의 정서를 베네치아 시민의 실내로 바꾸어, 한층 더 화려한 색채의 음악적 표현을 더하였다.

계란이 섞이는 프레스코화에 맞지 않는 항구인 베네치아에서는 비잔티움의 모자이크가 애호되었는데, 

나중에는 북방에서 전래한 유채화법이 베네치아에서 채용되어 회화 역사상 큰 변화를 몰고 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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