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네상스 시대 미술

        -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개념

중세를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잡는 의견은 다양한데 보통 1453년의 동로마 제국의 멸망이나 1521년의 루터교회의 출현으로 잡으며 1304~1374의 페트라르카의 시대가 중세라는 의견이 많은 편이다.

 

르네상스 미술은 1400, 그러니까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이탈리아에서 철학, 문학, 음악, 과학, 기술의 발전을 같이 하면서 서유럽에서 일어난 문화계의 변화한 현상으로 회화, 조각, 공예 등에서 생겨났다.

르네상스는 예술의 부활이라는 의미로 미술이 수단으로 여겨지던 중세 미술에서 탈피하여 미술의 그 자체를 인정해 주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로 돌아가자는 의미이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기본적인 성격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복원을 추구한다.  그래서 문예 부흥으로 번역된다. 

용어로서 르네상스의 의미는 '재생', '부활'이며 그 어원은 조르조 바사리의 책 1550년의 예술가 열전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그리스와 로마의 재림이라 하여 이탈리아어로 리나시타(rinascita, 부활)이라 거론한 것이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 중심이었던 중세 봉건 사회가 붕괴되고 상공업을 통한 근대 도시가 발달하면서 신 중심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가치가 변화했다. 이때부터 신을 위한 미술이 아닌 인간과 자연의 현실 세계를 위한 미술을 과학적인 법칙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일반적으로는 중세적인 문화가 쇠퇴하고 근세적인 문화가 성립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교황권이 약화되고 중세 흑사병 등과 도시의 발달 등으로 봉건 제도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문화 변화로, 그렇게 중세적 문화를 부정하고 근세적 문화를 성립했다고 생각된다.

프랑스의 역사가였던 쥘 미슐레가 '르네상스(Renaissance, 재탄생)'(re, 다시 + naissance, 탄생)으로 번역하고, 스위스의 역사가였던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확실하게 정의 내린 것이다.

 

돈의 논리 혹은 배금주의와 반대에 있는 인문주의는 인간다움을 중요시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는 인간주의, 인문주의라고 하기도 하며, 인도주의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따라서 '인간애'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부르크하르트는 인문주의자들이 신이 모든 것의 중심인 기독교의 신본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였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절로 회귀하려 한 운동, 즉 인문주의라고 해석했다. 다만 르네상스식 인문주의가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인간'을 의미한다는 해석에는 많은 반론이 쌓여있다.

 

그 반론으로는 예술과 문화에서의 성취가 개인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문명화’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미슐레, 부르크하르트, 페이터는 르네상스를 역사의 한 시대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신으로 바라보는 19세기식 개념을 만들어냈다. 르네상스를 이런 식으로 정의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는데, 15세기부터 계속된 현상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설명을 제시하기보다 그것을 19세기 유럽 사회의 이상향으로 설명한다

 

❤️ 르네상스 시대 회화의 혁신

르네상스 회화에서는 4가지의 혁신이 나타나게 되었다.


첫 번째 혁신은 멀고 가까운 것을 표현하여 공간감을 나타나게 해 준 원근법이다.
원근법은 브루넬레스키라는 건축가에 의해 처음 발명 되었다. 원근법이란 하나의 소실점을 기준으로 우리 눈에서 가까운 것은 크게 먼 것은 작게 그리는 방법으로 1차원의 평평한 그림에 3차원의 입체적인 공간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 혁신은 밝고 어두움을 통해 입체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명암법이다. 먼저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에 그려진 수태고지 그림으로 명암법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중세 시대의 고딕 양식으로 그려졌던 이 수태고지는 선을 위주로 평평한 느낌이 드는 반면에 르네상스 시대의 이 스테고지는 명암법을 통해 어두운 곳과 밝은 곳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입체감이 느껴진다.

세 번째 혁신은 그림의 세밀한 표현을 가능하게 해 주고 내구성을 높여준 유화의 발견이다.
유화는 얀반 에이크라는 화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전에는 가루 형태인 물감 안료를 계란 노른자나 벌꿀에 개어서 사용하는 템페라라는 물감을 사용하여 금방 물감이 썩어버리거나 떨어져 버려 내구성이 낮고 정도가 낮아서 표현이 어려웠다.
얀반 에이크가 계란 노른자 대신 기름을 섞어서 써보았더니 훨씬 내구성도 좋고 부드럽고 세밀한 표현이 가능해지고 그림의 퀄리티가 훨씬 좋아지게 되었다.
네 번째 혁신은 수학적인 비례를 통해 안정적인 느낌을 준 피라미드 구도이다.
피라미드 구도란 마사치오라는 화가에 의해서 보완된 구도로 마치 이집트에 있는 피라미드처럼 그림을 배치하는 방식이다.
피라미드 구도는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암굴의 성모라는 이 작품에서도 이렇게 피라미드 구도가 들어있다.

이러한 피라미드 구도는 황금 비례와 마찬가지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정적인 느낌을 받게 한다.

 

❤️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화파의 특징

        - 피렌체 화파

이탈리아에 로마의 유적과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기도 했고 교황이나 군주 등 예술의 후원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르네상스의 주요한 화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마사치오의 아담와 이브의 낙원추방


먼저 피렌체 화파는 마사치오라는 화가를 중심이며 그림에서 인물을 중심에 두었고 명확한 윤곽선을 통해 정확한 형태와 양감을 표현하고 안정적인 구조로 꽤나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에 의해 그림을 그렸다.

 

       - 베네치아 화파

 

조르조네의 폭풍

베네치아 화파는 조르조네라는 화가를 중심으로 그림에서 인물보다는 풍경 중심으로 형태나 이성보다는 현실주의적인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다.
피렌체 화파와는 사뭇 다르게 빛이나 색 분위기를 중점으로 두며 역동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는 등 상당히 감성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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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시대  고딕 건축 양식과 미술

        - 고딕 건축의 역사

고딕 건축 양식은 주로 12세기에서 14세기 유럽에 유행했던 건축 양식이다.
기독교의 최절정기 그래서 중세인들의 신앙심이 극명하게 표현되었던 건축 양식이 바로 고딕 양식이다.
순례 열풍과 함께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이 지어졌고 로마네스크 이후부터 르네상스가 본격화되기 시작하기 전까지의 유럽에서 유행했던 양식을 고딕 건축 양식이다.
원래 고딕이라는 말이 르네상스 시기에 이탈리아인들이 보기에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워져 있던 고딕 건축들이 조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에 조르조 바사리라는 미술 사학자가 있었다.
이 사람은 화가이자 건축가이기도 했는데 바사리는 로마네스크 다음의 시기를 마니아였고 고딕을 예전에 야만적인 게르만 민족 중에 고트족이 있었는데 바로 이런 고트족의 양식이라 하였다.
이 바사리의 시대에는 이탈리아가 미술의 중심지였고 그리스 로마와 같은 이제 고전 미술이 최고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사람인 이 바사리의 눈에는 프랑스 중심의 이런 양식이 천박하게 보였던 것이다.

 

12세기말, 고딕 건축이 발달하면서 덩달아 발달했다. 프랑스에서 처음 유행한 이래로 서유럽 전반과 알프스 북부에 두루 퍼졌으며,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미술 양식이 되었다. 지역 차이는 있으나, 고딕 미술 운동은 15세기경까지 계속되어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 고딕 건축 양식의 세 가지 양식


고딕 양식에는 세 가지 요소만 체크하면 된다.
먼저 첨부 아치, 플라잉 버트레스, 리브 볼트 이 세 가지를 필수적으로 알게 되면 유럽에 가셔서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을 구분해서 알 수가 있다.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두껍고 넓은 벽면이 제거되고 크고 높은 들창의 형성이 가능해지자 스테인드 글라스가 발달하였다.

13세기까지의 기술은 주로 모양에 맞추어 자른 색유리를 H자형 단면을 가진 납 테에 끼워 한 장의 그림을 조립하고 필요에 따라 쇠 테로 보강하여 창으로 시공하였다. 이것은 게르만 켈트의 전통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긴 중세의 역사를 통하여 발달하여 온 소공예(칠보 등)의 색면 대비의 아름다움에, 투과광의 영롱함을 결부시켜 대예술로 발전을 본 것이다.
둥근 모양 아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는 내부 안에 기둥들이 아취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고딕 양식으로 들어오게 되면 이런 아치들이 뾰족해지는 중간이 뾰족해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대표적인 성당이라고 할 수 있는 랭스 성당, 노트르담 성당들을 다 입구가 첨두아치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피사의 대성당과 프랑스 앙굴렘 성단과 입구 자체 외관 자체가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반면에 랭스 성당과 노트르담 성당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두 성당을 보면 이와 같이 첨두아치 끝이 뾰족한 첨두아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고딕 양식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르트르 대성당은 신랑의 높이 즉 주 건물 주 본당의 높이가 36.55m이고 종탑의 높이는 113m가 된다.

 

 

또 랭스 대성당은 신랑의 높이가 즉 주 성당의 높이가 38m고 종탑의 높이가 81m이다.
그러니까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들을 보게 되면 그들의 하늘을 향한 뜨거운 신앙심을 이렇게 열정적으로 건축 안에 심어놓았다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높이 솟은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팀목이 필요하고 플라잉 버트리스라고 하는 버팀목이 반드시 들어갔다.

일단 두껍게 만들어 세우고 그다음에 이와 같이 부벽을 대고 그 아래에 낮은 건물을 지어가지고 주벽을 유지했죠. 거기에 공중 부벽을 대어둔다. 이 공중부벽이라는 게 바로 플라잉 버트레스이다. 이 벽은 낮은 건물을 지어서 보정을 하고 첨탑을 지어서 첨탑으로 이 부벽의 높은 부분이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힘을 받쳐주는 형태 이것을 일컫는 것이다.


본당의 벽에 창문이 굉장히 크게 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퀼른 대성당은 창문이 크게 났고 천장이 높게 만들어서 그들의 신앙심을 표현했고 그 안에 빛으로 채워서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하고 싶어 했다.
그 벽 위에 넓은 창들이 스테인 글라스를 통해서 빛을 받아서 성당에 아주 신비한 그런 느낌으로 빛을 쬐는 것이다.


랭스 대성당의 외관은 너무나 웅장한데 재단이 있는 엡스라고 하는 부분은 바깥에서 보면 첨탑이 올려져 있다.
건물의 외벽을 따라서 첨탑과 플라잉 버트레스가 건물을 지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큰 창문들이 계속 이어져 있으며 이 창문에서 스테인글라스를 통해서 빛이 비쳐서 건물 안이 환하면서도 신비한 빛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을 가진 건축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세 번 째는 리브 볼트인데 늑골 궁륭이라 불린다.
고집 건축은 정상의 높이만 30~40m 이상 되기 때문에 천장이 돌로 된 천장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얇은 갈비뼈 같은 그런 기둥들을 많이 필요하다.
이 천장에 첨두 아치 형태의 얇은 갈비뼈와 같은 기둥들이 밑에까지 내려와서 하중을 천장으로부터 내려온 하중을 견디게 만드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고딕 양식이 오게 되면 리브 볼트 양식은 천장에 얇은 기둥들을 세워서 하중을 분산시키는 그런 전형적인 고딕 양식의 교회를 볼 수가 있다.
어두운 성당 안은 영롱하게 비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색과 빛 속에 완전히 종교적인 분위기가 넘치게 되었다. 전형적 작품 예로 샤르트르 대성당의 150개에 가까운 크고 작은 창이 모두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다.

 

이 시기에는 사실적 경향의 발달과 더불어 순수한 공예는 점점 쇠퇴하나 사본류는 13세기의 파리를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교회에 귀속하는 것보다 귀족의 주문에 의한 것이 많고 랭부르 형제의 작품인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는 그 좋은 예이다.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고딕 회화는 후에 플랑드르 파의 탄생을 맞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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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네스크 시대 미술

        - 로마네스크 시대란?

0세기부터 12세기(지역에 따라서는 13세기 전반까지를) 로마네스크 시대라 부른다. 

넓은 영토를 가진 프랑크제국이 분열되고, 노르만인, 사라센인 등의 거듭되는 침입으로 서유럽에 혼란과 공백이 계속되는 사이에 각지의 봉건 제후는 세력을 강화하고 고대 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로마네스크라는 칭하며 각지에서 부흥한 수도원을 단위로 해서 창조되는 것이 각광받는 일이 생기며 중앙집권제는 붕괴되었다.

로마네스크 미술은 대략적으로 기원후 약 1,000년부터 고딕 양식이 13세기 이후에 나타날 때까지의 서유럽의 미술을 말하며 두꺼운 석조의 벽체(壁體), 아치, 돔을 가진 건축에 끼친 고대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로마네스크(로마풍)라는 건축 양식이 대표적인 사항이다.

 

 

        - 로마네스크 시대의 역사적 사건

AD 395년에 동서 로마가 분열을 하고 동로마 제국은 분열되어서도 천년 이상은 유지가 되지만 서로마 제국은 금방 망했다. 그것은 라인강 북쪽에 있었던 게르만 민족들이 밀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게르만. 민족은 그들 옆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훈족 때문에 서쪽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기존의. 서로마 제국 영토를 게르만 민족들이 차지하게 되면서 이제 중세가 시작이 되는데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프랑크 왕국이 지금의 유럽 전체를 통일하게 되었다.

교황은 800년에 카를로스 대제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 서로마 제국의 전통을 잇는 황제가 된다. 오늘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대체적인 모습이 9세기 또는 10세기 경에 완성이 되었다. 5세기에서.5세기에서 10세기 중세인들은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 삶의 근본적인 해답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생겼고 내세의 천국으로 갈 수 있다면 그들은 현실을 감내할 수가 있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가려면 죽기 전에 일생 동안 저지른 죄를 용서받아야 된다고 믿었고 성지 순례는 가장 확실한 참여의 방법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당시에 그 험한 길들 미지의 길들 그리고 온갖 도적과 강도와 온 위험이 산재해 있는 그곳을 그들은 열정 종교적인 신념을 가지고 그 길을 찾아갔었던 것이다. 그런데 11세기 들어오게 되면 십자가 운동으로 성지순례 운동이 막히게 되었다.

그 와중에 뜻밖에도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장소가 중세 유럽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산티 야곱의 콤포스텔라이다. 야고보 성인이 예루살렘에서 순교를 당한 후에 제자들이 빈 배에 시신을 실어 보냈는데 그 배가 스페인 해안까지 떠내려왔고 거기에 어느 곳에 묻혀 있다가 800800년에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발굴됐다. 그 소문이 유럽에 기독교인들에게 퍼지자 산티아고 데 코페스타라까지 가보자 하는 순례 행렬이 붐을 이루게 된다. 본래의 예루살렘과 또는 로마 레지아가 있는 순례의 목적지였는데 이제 새롭게 산테아고도의 코페스테라라고 하는 새로운 목적지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묻혀 있는 이곳이 새로운 순례길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야고보 성인의 별이 빛나는 들판이라는 뜻이 산티아고 데 콤베스텔라이다.

산티아고 대 콘페스텔라에 세워진 성당이 최종적인 순례의 목적지가 되었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내  4개의 출발점은 모두 성당에서 출발을 하게 되겠다.이와 같은 순례 열풍은 수많은 편의시설을 제공해야 하고 편의시설을 만들다 보면 새로운 도시들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다음에 기존의 도시들도 새로운 순례객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대규모 성당을 짓고 또 도시의 모습을 새롭게 꾸미고자 하는 그런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 유럽의 11세기 12세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새로운 성당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 로마네스크 시대의 건축 양식과 대성당

 11세기 12세기에 이처럼 새로운 형식의 교회를 짓고자 하는 그 사람들이 어떤 일정한 형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지어졌던 교회들을 일컬어서 로마네스크 건축이라고 하는 것이다.

로마네스크라는 말은 뭐냐면 로마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따라와서 교회를 지었다 해서 로마를 닮은 로마식의 로마네스크 건축이 유행하게 되는 것이다. 로마의 건물 그러면 여러분 콜로세움을 대표적으로 떠올리게 되는데 콜로세움의 대표적인 건축 구조하면 아치를 말하겠다. 피사의 대성당이 보게 되면 아치의 연속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

아치는 위가 둥근 모습을 하고 아치가 길게 공간을 확보한 형태를 베롤 볼트라고 했다. 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들을 보게 되면 이렇게 둥근 천장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볼트 천장을 가진 긴 복도를 가지고 있는 건물이 지어지게 된다. 천장을 돌로 된 볼트 천장으로 만들고 돌을 이 위에 얹어놨기 때문에 하중이 많아졌다. 이것을 견디기 위해서 기둥과 벽이 두꺼워지고 상대적으로 이 하중을 견뎌야 되기 때문에 창문을 크게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실내가 약간 어두운 형식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이 지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공인 이후에 로마의 공공 회당이었던 바실리카 형식의 예배당을 지었던 것과 대조가 되는데 바실리카 양식은 우선 천장이 나무로 되어 있고 그에 비해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은 볼트식의 모양을 가지고 하중을 견디기 벽과 기둥들이 두꺼워야 했다.

안에 공간 볼트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은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아치가 길게 공간을 확보한 채 펼쳐져 있는 것을 볼트라고 하고 베롤 볼트라고 합니다. 그런데 양쪽으로 교차되는 볼트를 그로인 볼트라고 하는데 그로인 볼트 위에 돔이 이렇게 세워지거나 아니면 이 위에 종탑이 만들어졌다.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 성당인데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는 또 이렇게 종탑을 따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피사의 대성당과 피사의 사탑

우리가 알고 있는 피사의 사탑은 사실은 피사 대 성당의 부속물로 깔려 있는 종탑이다. 로마네스크의 앞쪽에 창은 원형으로서 장미와 차륜 그러니까 바퀴 모양의 어떤 구조물을 사용해서 채광이 될 수 있도록 빛이 들어오게 하고 그 모습을 좀 신성하게 만들어 놓았다. 산티아고 순례길과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은 동시대에 같이 있었던 사회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로마네스크의 조각은 고전적 조형의 전통을 가진 남부 지방인 프랑스나 에스파냐가 전개의 중심지로 교회 건축의 일부를 이루는 주두나 팀펀(입구 상부의 아치를 막는 반원형의 석판), 또는 입구의 옆쪽과 제실의 외벽 등의 공간을 메우고 있는 조각이 가장 잘 대표적이다.

11세기 중엽 이후의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에 속하는 일파의 활동 영향은, 중세조각의 양식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오턴, 베를레, 소류 등 클뤼니 파()의 사원은 오늘날 로마네스크 조각의 보고가 되어 있다. 신의 모습을 공공연히 표현하는 것은 종래의 기독교 미술 중에는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문맹의 농민에 대한 포교 장소가 되어 있던 교회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한 신이나 성서의 이야기가 많은 곳에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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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잔틴 시대 미술

        - 비잔틴 시대 미술의 역사적 흐름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인 콘산티노플로 옮긴 것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395년 로마 제국의 동서로 분열되었고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이 시점이 서양 중세의 시작으로 중세는 1400년까지 1천 년 동안 이어진다.

반면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의 역사는 1453년까지 이어진다.

서양 미술사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인정한 시점부터 동서 로마 제국의 분열 이후 서로마 제국 지역에서 나타난 점들을 역사적인 맥락으로 서술하고 있다.

로마제국은 영토가 너무 넓어져서 4등분 하여 다스리게 되었다. 아시다시피 로마는 끊임없이 영토를 넓히다 보니까 나중에는 너무나 이 영토가 비대해져 가지고 황제 혼자서 도저히 다스릴 수가 없어 4명의 황제를 나누어주는 사분령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4명의 황제가 나중에는 6명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까 황제 중 한 명이었던 콘스탄티누스라는 황제가 다른 황제들을 정리하고 강력한 경쟁자인 막센티우스하고 최후의 일전을 하여 콘스탄티누스가 라바룸이라 표식을 천사에게 받아서 결국 막센티우스를 이겨서 서쪽 로마 지역의 대권을 잡았다.
서로마의 단독 황제가 된 콘스탄티네스는 동남아 황제는 서로마 황제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합의 하에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내리고 결국 동쪽에 있던 황제마저도 굴복시키고 드디어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서쪽에서는 게르만족이 자꾸 침략을 하고 그리고 동쪽에서는 페르시아인들이 자꾸 침략을 했다. 그러다 보니까 콘스탄티누스가 수도인 로마를 떠나서 당시에 경제적인 중심지이자 전략적인 요충지인 이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이전을 했다.
이 비잔티움이 오늘날의 터키에서도 이스탄불이다.
비잔티움을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해 콘스탄티노풀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
서쪽 지역이 통치자가 비어버리니 서쪽 지역에다가 황제를 한 명 두고 다스리게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로마 제국은 두 곳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게르만족이 서쪽 지역에서 계속 밀고 내려오다 보니까 결국 476년에는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이제 폐위돼 버리고 게르만족에 의해서 결국 서로마는 망했다.
서로마는 망했지만 기독교는 그대로 남아서 오히려 서로마 기독교의 책임자인 교황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다.
동서가 이렇게 분열되었지만 완전히 남남이 된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관계는 유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 비잔틴 시대 미술의 특징 

      - 비잔틴 시대 미술의 실제 표현 방법과 특징

초기 기독교인들은 우상이나 신상을 떠올리게 하는 조각상 제작에는 반대를 했다.
하지만 회화는 성경의 내용을 전달해주는 기능을 하니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결국 6세기 말에 서로마에 있는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이를 지지해 준다.
하지만 그냥 아무렇게나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정해진 규칙이 있었다.
조건: 단순하게 그리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는 요소들은 배제하자 그래서 결국 사실성에 입각한 그림들은 꺼려지게 되었다.
바로 모자이크가 유행하게 된 이유가 생겨났다.
기독교 미술 초기에는 모자이크가 유행했는데 여기에서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은 모자이크가 유행한 이유로서는 첫 번째가 헬레니즘 시기의 영향이라 할 수 있고 헬레니즘 시기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모자이크를 많이 이용해서 대중화시켰다. 그런 점에서 그림보다 비싸니까 나는 이만큼 부유하다.라고. 부의 과시가 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당시 미술 양식의 영향이라고 되어 있는데 모자이크는 돌이나 유리 조각을 자른 것이라서 아무리 잘 만들어봤자 회화보다 사실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독교 미술에서는 이제 더 이상 사실성이 중요하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모자이크의 투박함도 용인이 될 수 있다.
세 번째로 신비로운 이미지라고 했는데 기독교 이전의 신들은 인간성도 갖고 있고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우며 여러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은 인간적인 모습도 있고 자연적이고 구체적인 존재였지만 기독교의 신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뭔가 신비로운 이미지를 사람들이 추구하게 되었다.
모자이크는 의도적으로 표면을 울퉁불퉁하게 만들어 가지고 빛이 반사되니까 빛의 반사에 따라서 신비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질 수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

가운데의 예수님이 계신 이 모자이크는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한다.
5개의 빵과 두 개의 물고기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신 기적을 나타낸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일단 이 예수님이 입으신 옷은 로마의 황족을 상징하는 자주색 의상을 입고 있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빵과 물고기를 지금 받고 있다. 그런데 받는 장면을 가만히 보면은 직접적으로 손을 터치하는 게 아니라 제자들이 옷으로 손을 가린 채 물건을 받고 있다.
이것은 당시 일반인들이 황제의 손에 직접 접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걸 막으려고 이런 식으로 손에다 무엇인가를 감싸고 했다고 한다. 이게 바로 반영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여기서는 예수님이 황제의 모습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옷주름을 보면 예수님에게서 뭔가를 받으려고 팔을 틀었는데 거기에 따라서 옷주름들이 이렇게 세부적으로 이렇게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바위들을 보면 여러 가지 색깔을 칠해가지고 어느 정도 입체감을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이걸 만든 사람은 그리스 미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다만 단순 명확하게 만들으라는 원칙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충실하게 이걸 제작했다.

 

❤️ 서로마 동로마의 갈등과 비잔틴 미술

        - 서로마와 동로마의 갈등

서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그림으로 성경의 내용을 묘사하는 것은 허용했다
서로마 쪽은 더 이상 논란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동로마 쪽은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서로마는 교황이 기독교의 총책임자이고 성직자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에 반해서 동로마는 세석권과 기독교를 모두 틀어쥐고 있는 사람은 황제였다.
그런데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가 730년에 성상 숭배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조각상은 물론이고 이제 페어로도 그리스도나 성녀 등을 그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걸 자신들뿐만 아니라 서로마에도 강요를 했다.
당시 동서 로마는 서로 갈라졌지만 로마 교황이 동로마에 세금을 내고 간섭도 받는 그런 처지였다.
하지만 성상 숭배 금지령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세상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포교하려면 구체적으로 보여줄 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로 두 로마는 완전히 남남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 후에 동로마는 레어 5세 때 또 한 차례의 성상 숭배 금지령이 내려졌다가 이 금지령이 점차 지지를 잃어서 결국엔 성상 숭배를 허용한다.
이제는 미술가들이 마음대로 막 그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까지 허용할 수는 없으니까 어떤 정해진 틀에 맞춰서 그리도록 했다. 그러한 그림을 이콘이라고 한다.
비즈틴 제국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의 관념을 따르도록 했다.
성모의 옷이 그리스의 조각상을 보듯이 주름이 잡혀 있고 약간 딱딱한 느낌이 나게 마치 조각한 것처럼 표현되었다. 얼굴이 그냥 단일색으로 평평하게 친해진 게 아니라 명함도 있고 나름대로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그리스 헬레니즘 시기의 특징이 얼굴에 입체감이 있고 그리고 조각상에 새겨진 주름 같은 것이다
성모의 무릎 부분이 빛의 반사가 일어나도록 금빛으로 표현하거나 빨간색 의복이라든지 보라색 혹은 진홍색 같이 황족의 색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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